[영상]강남은 어떻게 ‘강남’이 됐을까? 시골 촌구석에서 평당 1억까지, 강남 부동산의 모든 것 |
문재인 정부는 출범 7개월 동안 7번의 부동산 관련 대책을 발표했다. 최우선의 목표는 강남 집값 잡기. 대출을 옥죄고 재건축 초과이익환수금을 다시 시행하는 등 강도 높은 규제가 이어졌다. 시장의 우려에도 정부는 ‘핀셋규제’라며 성공을 자신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핀셋으로 누른 지역만 더 뛰어올랐다. 강남의 집값은 규제 전보다도 더 올랐고, 거래량마저 늘었다. 최근 잠깐 주춤한 모습이지만 거기까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오른 가격과 비교하면 큰 조정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애꿎은 수도권과 지방의 부동산만 침체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강남 집값을 잡겠다”던 정부. 발맞춰 공개된 고강도 규제. 그런데도 흔들림이 없는 강남. 대체 이유가 뭘까.
결국 본질은 ‘넘치는 수요’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장에서 재화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급보다 수요가 많으면 가격이 오른다. 당연한 진리다.
강남의 집값이 비싼 것은 공급량은 한정돼 있는 반면 수요는 끊이질 않는 탓이다. 이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정부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공급을 늘리거나 수요를 줄이거나.
문재인 정부는 수요가 줄어들게끔 유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지난해에는 주택담보대출한도를 내렸고 앞으로는 재개발에 따른 이익을 세금으로 환수하겠다고 결정했다. 보통의 시장에서 이 정도 규제가 적용될 경우 수요는 줄어들어야 맞다.
강남은 달랐다. 대출을 옥죄었지만, 이는 대출이 없으면 집을 구매하기 어려운 서민들에게만 치명적이다. 여유 자금이 많은 이들에게 대출은 집을 구매하는 데 쓰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세금 부과 역시 강남의 부동산 수요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남불패’라는 경험은 사람들에게 ‘강남 부동산 값은 내려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고 있다. 세금이 늘어도 가격 상승이 기대되는 한 차익의 유인은 여전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판매자의 세금을 부담하면서까지 강남 부동산을 사겠다는 수요도 존재한다. 강남의 부동산이 단순한 ‘경제재’로 여겨지는 것이 아닌 ‘지위재’의 성격을 띠게 된 셈이다. ‘나 강남 사는 사람이야’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대변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강남이 뭐길래 사람들은 이곳에 목매게 된 걸까.’
◇시골 촌구석이었던 강남, ‘천지개벽’의 길로
사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강남은 보잘 것 없었다. 행정구역상 경기도였던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가 서울시 성동구로 편입된 것 자체가 지금으로부터 겨우 55년 전인 1963년이었다. 서울로 편입되긴 했지만 강남은 여전히 낙후된 지역이었다.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 비만 오면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강남에 1960년대 말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니, 바람을 강제로 불러왔다는 표현이 맞겠다. 여러 요인이 맞물려 필연적으로 강남을 발전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다. 해방 당시 90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1966년 379만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1980년까지, 정확히 15년 동안 489만 3,500명이 더 늘었다. 하루 평균 900여 명.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는 인구 증가 추세였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는 큰 부담이었다. 모든 도시 기능이 강북에 몰려 있는 당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인구 증가 추세는 부작용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주택과 상하수도, 학교, 교통편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강북에 밀집된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해야만 했다.
남북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대적 상황도 강남을 개발해야 했던 또 다른 요인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일어났던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이 서울시민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던 1960년대 말. 한 해 걸러 터진 1·21사태(1960)와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1969)은 서울의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고 정부의 주요 기관 역시 이전해야 하는 직접적인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발표된 경제개발계획은 강남 개발의 도화선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울산과 포항, 창원 등 영남권에 공업단지를 조성했다. 문제는 서울과의 접근성이었다. 이를 위해 1966년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건설하기 시작하고, 1968년 이와 연결되는 경부고속도로 착공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강남은 ‘천지개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강남개발은 영동지구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다. 지금의 강남·서초 일대는 당시만 해도 영등포구의 동쪽이라는 의미에서 영동이라 불렸다. 1968년의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은 경부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함이었고, 1971년의 영동 2지구 사업은 강북 인구를 분산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 무렵 강남은 전기는 물론 공중전화나 전신전화취급소도 없던 한적한 시골이었다. 영동지구 사업으로 이곳에 도로가 깔리고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이 분양되기 시작했다. 파격적인 지원책은 덤이었다. 서울시는 강남으로 주거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1972년 ‘도시개발촉진에 따른 서울특별시세의 과세면제에 관한 특별조례’를 제정했다. 공공기관이 영동지구 내에 지은 건물에는 취득세가 면제됐고, 그 외 추가적인 세제 혜택도 더해졌다.
강남불패의 서막은 이 때부터 열렸다. 1963년부터 1970년까지 강남구 학동의 땅 값은 20배, 압구정동은 25배, 신사동은 50배가 올랐다. 같은 기간 중구 신당동이 10배, 용산구 후암동이 7.5배 오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상승세였다.
땅 값은 올랐지만, 강남은 강북에 비해 여전히 낙후된 지역이었다. 인구 분산을 위해서는 또 다른 조치가 필요했다.
◇정부 지원 등에 업고 ‘훨훨’
1972년 강북 도심은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지정된다. 종로구와 중구, 서대문구 일대의 각종 유흥시설 허가와 이전을 금지하고 백화점과 대학 등의 신설 및 증설도 막혔다. 이렇게 강북 도심 발전을 막은 상태에서 영동지구는 1973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된다. 부동산투기억제세, 영업세, 등록세, 취득세, 재산세, 도시계획세, 면허세가 모두 면제되는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각종 지원을 등에 엎고 1970년대 초·중반 반포주공아파트와 압구정 현대아파트, 그리고 이제는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지어진다. 영동지구 사업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의 골격이 갖춰지는 순간이었다. 강북에 위치했던 명문 고등학교의 이전도 이때부터 이뤄진다. 경기고등학교를 시작으로 휘문고와 서울고, 경기여고에 이르기까지 15개 학교가 지금의 강남4구(강남·서초·송파·강동)로 옮겨졌다.
강북의 고속버스터미널이 강남으로 이전한 것도 이 시기였다. 서울시는 도심 집중 완화와 강남 개발 촉진을 위해 1976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건설한다. 불과 4개월 만에 급조된 터미널은 당시만 해도 강북 터미널에서 출발한 고속버스가 잠시 들렸다 가는 중간 승차장의 개념이었다. 강남 개발의 목표와 맞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다음 해인 1977년 강북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골격을 갖춘 강남이 크게 성장한 계기는 지하철 2호선이었다. 1978년 착공돼 1984년 완공된 지하철 2호선은 강북 인구의 강남 이주를 눈에 띄게 늘렸다. 착공 직전 서울의 인구는 752만명으로 강북 9개구가 489만명, 강남 4개구는 263만명이었다. 인구 비율은 65대 35로 강북의 인구 밀도가 압도적이었다. 지하철2호선이 완공된 다음 해인 1985년에는 상황이 크게 변했다. 서울의 인구 964만6,000명 가운데 강북 10개구의 인구는 522만명, 강남 7개구의 인구는 442만6,000명으로 인구 비율 차이가 좁혀졌다.
1980년대 강남의 성장을 이끈 것은 교육열이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져 고교평준화 시대가 열린 것은 1974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중학교 졸업생은 추첨제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학군제의 도입이다. 서울 시청을 중심으로 반경 3km 이내 지역은 공동학군으로, 나머지 지역은 5개의 일반학군으로 구분됐다. 공동학군에만 서울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87개 가운데 46개가 밀집해 있을 정도로 강북의 도심 밀집 현상은 심했다.
이후 강북 명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큰 폭의 제도 변화가 단행된다. 1980년 이뤄진 거주지 중심의 완전학군제가 그것이다. 출신 중학교 중심의 고등학교 배정 방식을 거주지 중심으로 개편한 것이다. 공동학군에 위치했던 서울 내 최고 명문 고등학교가 이미 강남으로 이전한 상황. 이 학교들은 이제 강남에 거주하는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돼 버렸다.
실제 강남 내 명문고의 약진은 이때부터 두드러진다. 완전학군제 세대가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1984년 서울대 합격생 수를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영동고 78명, 경기고 74명, 상문고 58명, 서울고 54명 등이었다. 고등학교 평준화 세대가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1977년 강남 내 고등학교에서 서울대 합격생을 가장 많이 배출했던 영동고가 17명에 그친 점을 봤을 때 엄청난 변화였다.
◇‘돈 있으면 강남 가고, 강남 가면 명문대 간다’
그렇게 강남의 명문고등학교가 떠오르면서 강남 인구도 폭등한다. 1980년대 중반 서울의 가구 증가율은 7.9%, 고교생 증가율은 1.2%인데 반해 강남과 서초의 가구 증가율은 23.4%, 고교생 증가율은 57.5%에 달했을 정도였다.
강남의 교육과 부동산이 맞물리게 된 시기가 이때부터다. 소위 ‘돈 있으면 강남 가고, 강남 가면 명문대 간다’는 말이 나돌았다. 고위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던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도 이 시기부터 등장했다.
각종 상업, 오피스 시설이 강남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부터다. 지하철 2호선이 개통하면서 강북 도심에 있던 기업들이 하나둘씩 강남으로 이전했고, 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개발에 더 박차가 가해졌다. 특히 강남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초고층 빌딩들이 마천루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강남이었지만,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강남의 집값은 강북과 큰 격차가 없었다. 노태우 정부가 1980년대 말부터 1기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면서 전반적인 집값이 안정세를 보였던 덕분이다. 1997년 터졌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겪었던 사상 초유의 집값 폭락도 한몫 했다.
실제로 강남 집값이 주변부와의 격차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강남에 위치한 5만여 가구의 저층 아파트 재건축이 본격화하면서 다시 한 번 개발 열풍이 몰아친 덕분이다. 1970년대 수많은 혜택 속에 탄생했던 대규모 단지가 고층 주거촌으로 탈바꿈하면서 강남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후 강남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흔들림도 이겨내고 부촌으로의 입지를 굳건히 하며 지속적인 상승세를 이어오고 있다. 이제 강남의 부동산 가격은 강북과 비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높이 올라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강남을 ‘강남’으로 만든 것은 정부의 정책이었다. 강북에 몰린 도심의 기능을 분산하기 위해 수많은 혜택과 개발을 이어온 끝에 지금의 강남에 이르렀다. 이제 와서 인위적으로 강남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강남 집 값, 대책은 없을까
문재인 정부는 이미 재건축, 대출, 청약, 세금 등 강남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한 거의 모든 카드를 썼다. 수요를 줄이기 위한 강력한 규제는 시장에서 도리어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다주택자들은 지방에 분산 투자했던 자금을 거둬들이고 ‘똘똘한 한 채’가 있는 강남 부동산으로 몰려들고 있다. 특수목적고와 자립형 사립고를 폐지하겠다는 교육 정책은 서울 기타 지역과 수도권 곳곳으로 분산됐던 맹모들의 발길을 다시 강남으로 되돌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안전진단강화로 재건축 사업 추진을 어렵게 만든 정부의 결정은 신규 공급마저 줄일 것으로 보인다.
딱히 ‘묘안’은 보이지 않는다. 보유세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지만 역시나 수요 억제책에 불과한데다 금액이 크지 않아 강남 부동산을 소유한 부자들에게 부담을 주기 힘들다. 남은 선택지는 공급 증가다. 이마저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강남에는 비어있는 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래된 아파트를 허물고 새로 짓는 재건축 사업으로 신규 공급이 이뤄진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안전진단기준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재건축 사업을 사실상 불허 했다.
그렇다면 남은 카드는 하나다. 수요자들에게 강남 외의 선택지를 쥐어주는 방법이다. 강남의 인기가 높은 것은 단순히 집이 좋아서가 아니다. 입지, 교통, 학군 등 다양한 인프라가 강남에 집중된 덕분이다. 강남 지역에 대기업 빌딩, 편의시설 등 각종 인프라가 몰리는 것을 규제하는 동시에 다른 곳에 지하철, 병원, 쇼핑몰 등의 인프라를 건설해 대체지를 만들어 준다면 수요의 분산을 꾀할 수 있다. 실제 노태우 정부 당시 강남을 대체할 수 있는 1기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강남 집값이 안정된 사실이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누구나 입성을 꿈꾸는 지역으로. 196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강남은 압축성장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동네로 거듭났다. 이제 앞으로의 강남은 어떻게 변해갈까.
/정순구·정수현기자 soo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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