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감독 이창동)에서 ‘대단한 형체’나 ‘대단한 목적’을 찾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제목은 뜨겁게 불타오름을 뜻하지만, 실체는 공허하고 차갑기 그지없다. 주인공들에게 ‘무엇’을 불태우는 지는 중요치 않다. 그들은 불태우는 ‘행위’에 몰두할 뿐이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 받으면서 비밀스럽고도 미스터리한 사건이 펼쳐지는 이야기다.
종수, 해미, 벤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이다. 전혀 엮일 일 없던, 이전까지 딱히 엮여있지도 않았던 이들은 한 번의 우연한 마주침 이후 계속된 끌림으로 만남을 갖는다. 종수와 벤 사이에는 해미라는 교집합이 있었고, 세 사람 사이에는 ‘허무’와 ‘무력감’이라는 감정이 관통했다.
종수와 해미는 근사하게 진화한 사회에서 정작 설 곳 없는 좌절감을 느끼고, 내 편 아닌 가족에 대한 상실감이 크다. 반대로 부, 지식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벤은 더 이상 도달할 목표가 없어 공허함에 빠져있었다. 각자 위치와 환경은 달라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낀 세 청춘은 허무주의, 염세주의에 살고 있었다.
이는 곧 따분함, 뒤이어 ‘분노’라는 것으로 변질된다. ‘젊음’의 기질에서 간간이 끓어오르는 어쩔 수 없는 욕망이 분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無에 대한 혐오가 내재된 세 사람은 어떠한 대상의 소멸을 통해 동질감을 얻고 환락에 도달한다. 영화에선 소멸시키는 대상을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라고 언급했지만 생물 즉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
그 끊임없는 욕구로 화형을 저지르는 이들은 각자의 도덕적 판단으로 감히 부도덕한 것에 단죄를 내린다고 포장한다. 벤은 아무 생각 없이 쾌락을 좇아 되는대로 사는 해미를 단죄했을 거다. 종수는 운이 좋아 타고난 ‘금수저’(벤)가 신의 행세를 하는 거만함에 치를 떨었을 거다. 그렇게 벤과 종수는 ‘치기어린 정의감’이란 변명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자멸한다.
‘버닝’은 의외로 세련되거나 파격적인 화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어느 작품에서 한 번쯤 스쳐봤을 법한 청춘의 단상이 보이며, 벤의 미스터리함을 푸는 단서가 명확하게 제시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벤의 행각보다 세 남녀의 형용하기 힘든 심리상태다. 해미의 판토마임처럼, 숨어있던 고양이처럼 잡힐 듯 말 듯 실체를 알 수 없이 붕 떠버린 관념이 종수, 해미, 벤의 마음이자 꽤 많은 2018년 청춘의 거울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유아인은 최고의 낙점이다. 그간의 필모그래피로 ‘청춘의 아이콘’ 행보를 보여주며 SNS로 복잡한 내면을 가감 없이 쏟아놓은 유아인은 종수의 무너지는 처지와 방황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또 관객들은 ‘유아인’이라는 프레임으로 종수에 접근하기 쉬운 효과를 얻는다. 적지 않은 성적묘사가 설득력을 갖는 것도 유아인이 주는 고뇌의 무게를 익히 알아서일 터다.
지금까지 밝고 신비한 이미지였던 스티븐 연은 어둡고 미스터리하게 변신했다. 그의 여유 있는 미소가 벤을 섬뜩하게 만드는 무기가 됐다. 신예 전종서는 이창동 감독의 선구안을 입증하듯 자유롭고 순수한 영혼의 해미를 그대로 표현했다. 의미 불명의 허공을 향한 눈빛이 불안한 청춘을 비춘 듯하다.
‘열혈 청춘’이란 말도 지난 유행어로 전락한 지 오래다. 최근엔 ‘청춘’에 ‘N포’ ‘아픈’ ‘실패’ ‘상처’가 더 쉽게 붙어버린 형국이다. ‘버닝’은 좌절로 점철된 우리가 분노를 발화시키는 대상이 결국 우리는 아닐지 묻는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17일 개봉.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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