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회장 선거가 문제입니까." 유럽축구연맹(UEFA) 인사들 사이에서 나온 반응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앞세운 미국 법무부의 대대적인 국제축구연맹(FIFA) 수사에 세계 축구계가 술렁이고 있다. 제프 블라터(79·스위스) 회장의 5선이 확실해 보였던 FIFA 회장 선거는 29일(이하 현지시간) 예정대로 진행될지도 미지수다. UEFA는 27일 "FIFA를 둘러싼 총체적 부패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다시 한 번 확인됐다. 회장 선거 연기를 28일 공식 요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FIFA가 111년 역사상 최대 위기를 맞았다. 수십 년간 관행화된 FIFA의 비리에 대해 물밑에서 조사해온 미국 정부는 스위스 취리히의 호텔 등에서 체포된 14명의 명단을 공표하고 기소 방침을 밝혔다. 본격적인 '심판'에 나선 것이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검찰의 수사에 따라 이들에게는 공갈, 온라인 금융사기, 돈세탁 공모, 탈세, 국외계좌 운영 등 47개 혐의가 적용됐다. 미국의 요청으로 스위스 검찰이 체포작전을 펼쳤으며 붙잡힌 인원은 FIFA 고위직 9명, 미국과 남미 스포츠마케팅회사 간부 4명, 뇌물 수수 중개자 1명이었다. 고위직들은 제프리 웹 FIFA 집행위원회 부회장 등 북중미카리브해축구연맹(CONCACAF)이나 남미축구연맹(CONMEBOL) 인사들이 대다수였다. CONCACAF와 CONMEBOL은 블라터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다. 로레타 린치 미 법무장관은 당장 블라터를 기소할 계획은 없다고 했지만 고위직들에 대한 수사에 속도가 붙은 만큼 블라터 소환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미국 스포츠마케팅회사의 대표도 대회 마케팅, 중계권 등을 따내기 위해 뇌물·리베이트를 FIFA 측에 건넸거나 전달을 약속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어 미국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FIFA 고위인사들의 뇌물 수수 모의 장소가 미국이었고 돈이 미국 은행을 통해 오갔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광범위한 비리에 대한 수사 전체를 주도하고 있다. 월드컵에 가장 많은 중계권료를 내는 곳도 미국 방송사다. 혐의 당사자의 신병을 인도하는 데만 수년이 걸릴 가능성도 있지만 미국의 수사 의지가 워낙 강해 17년간 담장을 높여온 '블라터 왕국'이 이번에야말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CNN에 따르면 FBI는 FIFA 비리에 3년간 매달려왔다. CONCACAF 2인자인 척 블레이저(미국)의 탈세를 조사하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장기 복역에 두려움을 느낀 블레이저는 FIFA 내부자료와 녹취록을 FBI에 넘기며 정보원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04년 창립한 FIFA는 축구의 거대한 인기를 등에 업고 부를 축적해왔다. 지난해 브라질월드컵 중계권과 마케팅권 판매로만 6조3,000억원에 이르는 수입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현금 보유액도 1조6,500억원 이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FIFA는 그러나 취리히에 비영리단체로 등록돼 있어 세금을 내지 않는다. 1998년 블라터 회장 체제로 전환한 후로는 폐쇄성이 더 강해졌다. 독일의 기자 출신 스포츠·정치 전문가 토마스 키스트너가 2012년 쓴 책 '피파 마피아'에 따르면 블라터는 혼자서 FIFA의 재무정책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그의 연봉과 활동비는 FIFA 내에서도 아무도 모른다. 세 차례나 연임에 성공하면서 그의 지배력은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을 만큼 공고해졌다.
블라터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FIFA 고위직들은 올해 남미축구선수권대회 준비 과정에서 돈을 챙기는 등 24년간 1,675억원 이상의 뇌물 수수를 일삼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2018 러시아월드컵, 2022 카타르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도 뇌물이 오갔다는 의혹은 이미 2010년부터 불거졌다. 이에 미국인 변호사인 마이클 가르시아가 FIFA의 개최지 비리에 관한 430쪽 분량의 보고서를 지난해 작성했지만 FIFA는 이 보고서의 원본 공개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르시아가 같은 뉴욕 검사 출신인 린치 법무장관, 제임스 코미 FBI 국장에게 수사의 동기를 마련해줬을 것이라는 추측도 설득력을 얻는다.
한편 블래터는 27일 "미국과 스위스 당국의 수사는 FIFA가 그동안 축구계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해왔던 조치들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관련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FIFA 내 비리를 없애고 신뢰를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FIFA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는 "FIFA 고위인사들이 체포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다음 차례는 블라터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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