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역에서 호남선 고속철도(KTX)를 타고 3시간 반 가량을 달려 목포역에 접근하자 역사 인근에 위치한'근화네오빌'과 '근화블루빌' 아파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택시를 타고 목포 시내를 이동하는 도중에도 근화밀레니엄빌리지, 근화황제아파트, 근화맨션 등 곳곳에 근화건설이 시공한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근화건설의 인지도가 낮지만 목포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를 공급한 건설사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오죽하면 "목포에서 근화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근화건설이 1989년 설립 후 목포 지역에서 공급한 아파트만 10개 사업지 총 2,741가구에 달한다. 인근 옥암 남악신도시에 공급한 아파트까지 합치면 5,000가구가 넘는다. 한 가구당 최소 2명씩만 잡아도 1만명 이상이 근화건설이 지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지난 달 30일 목포를 대표하는 기업인인 김호남(64) 근화건설 대표를 목포상공회의소에서 만났다. 김 대표는 지난해 5월 제21대 목포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지역 경제 발전과 상공인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수필집과 경영학 박사 학위 증서, 아파트 분양 자료 등 인생 궤적을 엿볼 수 있는 물건들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김 대표는 "목포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기까지의 인생을 이야기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해 이곳을 인터뷰 장소로 정했다"며 제대 후 40여년에 걸친 인생 역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업가 김호남, 끈기와 책임감 갖춘 CEO 꿈꾸다
김 대표는 인터뷰 내내 끈기와 책임감을 강조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김 대표가 끈기와 책임감을 중시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군 복무중이던 스무 한 살때 아버지를 여읜 김 대표는 제대하자마자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4남2녀 중 장남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집안을 일으키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일념뿐이었던 김 대표는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견딘다는 마음을 이때부터 갖게 됐다. 그는"당시의 경험들이 책임감이 뭔지 알 수 있게 해줬고 오늘의 근화건설을 만드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
김 대표가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 1986년이다. 당시 수협에서 근무하던 김 대표는 친한 선배의 제안으로 종원건설 대표를 맡게 됐고 이후 사업 확장을 위해 1989년 근화건설을 설립했다. 목포를 중심으로 사업을 벌인 김 대표는 분양하는 아파트 사업마다 큰 성공을 거두면서 지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사세를 키웠다. 지난 2011년 분양한 '근화베아채스위트'와 '베아채비올레'의 경우 각각 11대1과 13대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하며 단숨에 전체 물량을 팔아치웠다. 이들 단지는 분양 당시 모델하우스에 1주일 동안 5만여명이 다녀갈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김 대표는 "당시 금융위기 이후 경기가 좋지 않아 미분양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분양결과가 너무 좋아 놀랐다"며 "목포에서 오랫동안 사업하면서 그래도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지는 않았구나하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분양한 '근화옥암베아채'는 원래 다른 건설사가 짓다가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5년이나 공사가 중단됐던 사업장이었다. 흉물로 방치된 사업장을 인수하려하자 주위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분양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김 대표는 "지역기업이 공사를 마무리해야한다"며 인수를 결정했고, 보란듯이 분양에도 성공했다.
"근화건설은 목포의 향토기업입니다. 목포에서 성장했으니 지역에 기여해야죠. 좋은 기업에게는 고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힘을 고향에서 얻었으니 기업이 성장한 만큼 고향에도 기여해야죠. 지역과 향토기업은 서로에게 자양분을 주는 존재입니다."
수필가 김호남, 글쓰기로 내면을 가꾸다
김 대표는 벌써 4권의 수필집을 낸 수필가다. 2007년 '새들은 함부로 집을 짓지 않는다'를 펴낸 것을 시작으로'삶의 물레는 돌고 도는데''바다를 품다''아름다운 유산'등을 잇따라 출간했다.
김 대표가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다. 당시 목포에서도 신군부 세력에 저항해 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과 사람들의 이야기, 표정 등을 글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를 수필가의 길로 이끌었다. 워낙 고향을 사랑하다 보니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보람있는 일로 느껴졌다고. 처음에는 글솜씨가 부족해 경험했던 일들을 간단히 메모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준곤 목포해양대 국문과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글쓰기를 배우면서 조금씩 문장력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김 대표가 발표한 수필의 소재는 주로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경험과 생각,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정 등이다. 특히 '바다를 품다'에는 딸과 직장 후배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등이 오롯이 담겨 지역 문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 대표는"당시 둘째 딸이 위암수술을 받았고, 가장 아끼던 직장 후배가 사고사를 당하는 등 가슴 아프고 힘든 일들이 많았다"며 "글을 쓰면서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고 다시 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에 발간한 '아름다운 유산'에는 사업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목포상공회의소 회장이 되기까지의 과정 등을 담았다. 책 표지에는 그가 부지와 건축비용을 지원해 짓고 있는 '바다생명 문학의 집'의 완공 예정 사진을 넣었다.
건설사 최고경영자(CEO)와 상공회의소 회장을 겸하면서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틈틈히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김 대표는 "제게 글쓰기는 자기성찰행위"라고 말했다. 생각과 행동들을 한번 쏟아내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글로 남긴 것을 보고 반성하면서 행동을 바로잡게 된다는 것이다.
"솔개는 30년을 살다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부리와 발톱으로 날개를 수리해 또 30년을 산다고 합니다. 제게는 글을 쓰는 과정이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행위입니다. 글을 읽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반성하는 과정은 사업을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CEO는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힘은 통찰력에서 나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죠."
'희망 공장장' 김호남, 목포 경제 발전에 몸을 던지다
지역 경제단체 수장을 맡고 있기도 하지만 목포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김 대표의 열망과 의지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늦깎이로 공부를 시작해 2000년 초당대 입학을 시작으로 지난해 목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그가 전공한 분야는 물류ㆍ운송ㆍ수출 등 지역경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이다. 석ㆍ박사 논문의 주제가 '목포항의 크루즈터미널 건립 개발방향'과 '전남지역의 제조업 효율성과 수출 경쟁력'이다. 목포지역은 10개 시ㆍ군이 모두 전부 바다와 연접해 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목포 경제를 발전시킬 방안을 꾸준히 연구해 온 것이다.
"부산이 성장한 것은 바다와 가까운 장점을 잘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류사업과 조선사업이 함께 발전하면서 경제적 역량이 확대된 것이죠. 목포도 물류사업이 발전해야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고 봅니다. 2015년 임기까지 목포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하는 것이 제1목표입니다."
김 대표의 꿈은 목포를 물류ㆍ조선ㆍ수출입을 아우르는 클러스터로 육성하는 것이다. 다양한 중소기업과 중국기업들이 목포 지역에 공장을 짓고 활발하게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을 계획이다. 특히 그는 철도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대표는"목포-부산을 연결하는 고속철도를 개통해야 한다"며 "동서간의 균형발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지역적 통합 및 전국 대통합의 양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역 경제 발전에 대한 김 대표의 열망은 지난해 펴낸 수필집'아름다운 유산'의 책 제목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지역과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기고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아파트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이제는 지역 주민 모두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그 길을 찾기 위한 지혜를 얻을 겁니다."
● 김호남 대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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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목포에 애정 각별한 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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