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1998년 경제부처를 출입하던 때다. 단군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직후였고 수평적 정권교체가 있은 후였기에 어느 때보다 새 정부 경제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새롭게 장관이 된 한 경제관료의 이력을 쓰는데 공무원의 출발이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관으로 돼 있었다. 줄여서 경과심으로 쓰던 이 기구는 당시 경제기획원(EPB)ㆍ재무부(MOF)ㆍ상공부 등을 주요 부처로 알고 있던 기자에게는 생소한 명칭이었다.
그런데 다시 장ㆍ차관급 공무원들의 이력을 살펴보니 상당수가 경과심에서 공직을 시작했거나 경과심을 한번씩 거쳤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과심은 1962년 개정된 헌법으로 설치된 대통령 특수 자문조직으로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대통령이 임명하거나 위촉하는 경제ㆍ과학에 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위원으로 구성됐다.
과학과 경제를 통해 나라 세우기에 나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를 충분히 활용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해외 순방기간 만난 촉망 받는 한국의 젊은 학자들을 장관급인 경과심 상임위원으로 위촉해 한국으로 불러들이고 이들에게 과학기술 발전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의 방안에 따라 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과학기술재단이 만들어졌고 정부부처로 과학기술처가 발족했다.
경제·과학기술 발전 토대 마련
과학자뿐 아니라 경제학자와 전 정권인 1, 2공화국 때의 관료ㆍ정치인들을 경과심 상임위원으로 앉혀 거시경제에 관해 자문하게 만들었다. 18일 별세한 남덕우 전 총리도 서강대 교수와 미 스탠퍼드대 초빙교수로 있다가 1969년 경과심 상임위원으로 임명됐다. 그는 이후 박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재무장관과 경제부총리로 기용돼 1970년대 우리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경과심은 과학기술 분야뿐만 아니라 1, 2차 오일쇼크 이후의 산업구조고도화대책과 과학기술종합발전대책과 같은 거시경제 큰 틀에서의 장기대책을 만들기도 했다. 실제 10ㆍ26이 있었던 1979년에는 박 전 대통령의 소극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경제안정화대책을 만들어 과열된 경기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경과심은 자문 조직이지만 회의에 상정할 의안 정리, 자료의 준비와 연구를 위해 사무국을 뒀다. 행정고시 합격자를 배치할 때도 경과심을 1순위로 배치하기도 해 우수한 인재들이 상당수 경과심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경과심 출신 공무원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것이 후배 공무원들의 전언이다.
결론적으로 경과심에 대해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제 3, 4공화국 시절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경제 분야에서만은 국민들의 전반적인 컨센서스를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이 때문에 정치와 별개로 우리 경제가 1970, 1980년대 고도성장이 가능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정치 부장단 만찬에서 논란이 된 창조경제 개념에 대해 말했다.
박 대통령은 새 정부 경제 모델이 되고 있는 창조경제에 대해 "창조적 국민이 그것을 마음껏 발휘하고 실패해도 겁먹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것이고 그 멍석을 까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벤처라는 것은 정부가 지출하는 게 아니라 좋은 생태계를 만드는 것, 엔젤투자를 활성화하고 융복합 인수합병(M&A)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규제를 획기적으로 푸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고 말했다.
창조경제 동의 이끌어낼 조직 필요
박 전 대통령에게는 불과 82달러(1961년)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한 최대 화두가 과학기술이었다면 그 딸인 박 대통령의 그것은 창조경제다.
박 대통령은 이런 창조경제의 목적을 "수요를 새로 만들고 시장을 새로 만들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창조경제의 개념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핵심은 개념이 정확하지 않아 소관 부서별로 서로 얘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창조경제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박 대통령도 경제과학심의회의와 같은 조직을 한번 만들어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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