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주요국 중앙은행 간의 통화정책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미국 달러 가치가 치솟고 있다. 유럽·일본·호주 등 주요국들이 디플레이션 위기를 막기 위해 양적완화 조치 시사나 환율시장 구두 개입 등에 나선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경제지표가 호조를 보이면서 기준금리 조기 인상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주요국들이 통화가치 절하 경쟁을 벌이면서 인플레이션 촉진을 위한 신환율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불거지고 있다.
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뉴욕 외환 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105.09엔에 거래되며 엔화 가치가 8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8년 10월 이후 7년 만에 최저점이었던 1월2일의 105.44엔에 근접한 것이다. 유로화 가치도 달러당 1.3132달러에 거래되며 전날의 1.3128달러보다 소폭 상승했지만 여전히 11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주요 7개국 통화 대비 달러 환율을 나타내는 WSJ 달러 인덱스도 올 7월 이후 두 달 만에 3.4%나 상승하며 1년여 만에 최고치를 나타냈다.
달러 가치가 상승세로 돌아선 것은 미 경제지표 호조로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조기 인상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최근 블룸버그가 이코노미스트를 대상으로 첫 금리인상 시점을 조사한 결과 내년 6월이 44%에 이르렀다. 내년 8월 전망도 36%에 달하면서 갈수록 금리인상 전망 시기가 앞당겨지는 모양새다. 이날 발표된 미 공급관리자협회(ISM)의 8월 제조업지수나 7월 미 건설 지출도 일제히 시장 전망치를 웃돌았다.
이 때문에 미 달러화도 추가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JP모건의 니얼 오코노 기술분석가는 이날 "10개 주요 통화 대비 달러화 환율을 나타내는 블룸버그 달러 스폿 지수가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200일 이동평균선이 50일선을 웃도는 골든 크로스가 임박했다"며 "달러화 가치가 더 위쪽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 따르면 유로화나 엔화 대비 달러화 상승에 베팅한 계약 수는 지난달 26일 현재 25만여건으로 올 초의 2배에 이르면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조만간 발표하는 내각이 일본 공적연금(GPIF)을 동원해 일본 주식과 해외 자산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소식이 엔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의 경제 성적표가 기대 이하로 나타나자 3~4일 열리는 일본은행(BOJ)의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 양적완화 조치를 시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엔·달러 환율이 올해 안으로 107~108엔까지 급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유로화 역시 당분간 약세 흐름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럽중앙은행(ECB)이 4일 통화정책회의에서 유로화 가치 절하를 통한 수출 경쟁력 향상 등을 위해 추가 경기 부양 조치를 시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기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블룸버그 조사에 따르면 ECB가 올해나 내년까지 자산매입 조치를 실행할 것이라는 응답은 44%에 이르렀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최근 "유로화 강세가 경제성장을 위협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구두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영국도 최근 제조업 지표 부진 등으로 연내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이날 "달러화 가치가 내년 중순까지 유로화와 파운드화에 대해 각각 1.25달러, 1.6달러, 엔화 대비로는 12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미국을 제외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경기 부양책을 서두르면서 통화전쟁이 불붙을 조짐도 보인다. 블룸버그는 "과거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 목적이 물가통제였다면 지금은 인플레이션 상승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최근 호주와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원자재·유제품 등 주요 수출품의 가격하락으로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자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미 외환시장에 개입한 국가도 속출하고 있다. 최근 체코 중앙은행의 경우 디플레이션 타개를 위해 자국 코루나화의 환율 상한선을 2016년까지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스위스 중앙은행 역시 프랑화 상한선을 앞으로 최소한 2년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폴란드·헝가리도 외환시장 개입을 서두르고 있는 실정이다.
제프리 유 UBS 외환전략가는 "ECB의 양적완화로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면 스웨덴·노르웨이도 상대적인 통화절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환율 상한선 설정을 검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올 6월 ECB가 기준금리를 전격적으로 인하하자 7월 스웨덴도 금리인하 조치를 단행했고 노르웨이도 예상을 깨고 금리인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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