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에서 비롯된 금융불안이 신흥국의 자금경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2주 연속 국채발행을 연기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은 금리상승으로 자금차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러시아 재무부는 4일(현지시간) 최근 시장 상황을 분석한 결과 예정돼 있던 국채발행을 지난주에 이어 다시 취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60억달러 상당의 루블화를 국부펀드로 이관하기로 한 계획도 연기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결정은 국채 추가 발행이 국채금리를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러시아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현재 4.5% 수준으로 올 들어 0.7~0.8%포인트 올랐다. 신흥국 금융불안에 따른 선진국으로의 자금이동이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국채금리 상승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도 올 들어 달러화 대비 6.5%나 떨어졌다. 통화가치 하락폭으로는 주요 신흥국 중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높다. 달러·유로 바스켓에 대한 루블화 가치도 이날 한때 41.47까지 하락했다가 40.69로 회복됐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러시아가 자금 유출에 대처하기 위해 조만간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로만 주가예프 OAO-BFA은행 트레이더는 "지금의 러시아 시장은 200억루블 규모의 3~7년 만기 국채도 소화할 수 없는 상태"이라며 "앞으로 상황은 루블화 가치와 여타 신흥국 사정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무랏 토프락 HSBC 신흥시장 전략가도 "자금시장의 급속한 호전이 없다면 앞으로 자금조달에 치명적 의문이 제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7일 개막하는 소치 동계올림픽을 통해 이른바 '제국의 부활'을 세계에 알리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잔치가 끝나면 고통만 남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다.
지난해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은 1.3%에 그쳤고 앞으로 10년 이상 경제성장률이 전세계 평균을 밑돌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러시아는 시장의 우려에 채권발행 취소가 큰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알렉세이 모이세프 재무차관은 "이번 조치가 중앙은행에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며 "외환시장이 곧 안정될 것으로 본다. 통상적으로 2월 중반부터 루블화 가치가 안정돼왔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불과 0.5%로 국채발행의 필요성은 크지 않은 편이다. 신흥국 불안 확산으로 아프리카 국가들도 자금차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채금리가 지난 4년 반 사이 최고 수준까지 올라 이들 국가가 빈곤 퇴치용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잠비아는 2012년 9월 7억5,000만달러를 유로채권으로 차입할 때 적용됐던 금리보다 2.98%포인트 뛴 8.15%이며 나이지리아의 국채금리도 지난해 7월 10년 만기 국채를 발행했을 때보다 0.4%포인트 상승해 6.2%에 달한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채권수요는 충분히 활발하지만 금리가 오르면 차입부담이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 세계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아프리카 국가들은 오는 2019년까지 인프라 개선과 빈곤 퇴치를 위해 매년 930억달러의 자금차입이 필요하며 가나·케냐·나이지리아·르완다·잠비아는 올해 60억달러 규모의 채권발행에 나설 예정이다.
일부에서는 신흥국의 자금유출이 투자자들의 과장된 위기의식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 세르지오 에모티 UBS 최고경영자(CEO)는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신흥국의 자금이탈 상황은 단기적으로 봤을 때 다소 과장됐다"며 "글로벌 자금이 잘못된 방향으로 이동하면 다른 쪽에서 매우 충격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우 메릴린치 글로벌 금리·환율부문 대표도 전날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신흥국 위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는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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