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여름 보스턴에서 있었던 일이다. 필자가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되던 해 8월 필자가 재학 중이었던 보스턴대학 주최로 제16회 국제통계물리학회가 열렸다. 필자는 자연스럽게 자원봉사자로 참여했고 등록대에서 참가자에게 등록카드를 건네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동안 논문에서 이름만 봤던 통계물리학의 거장들이 필자에게 다가와 카드를 받고 갔다. 그들을 처음으로 상면한 한 젊은 청년의 가슴은 뛰었고 그 감격을 지금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27년이 지난 지난주 21~26일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에서 제25회 국제통계물리학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창조는 사고전환ㆍ융합 통해 이뤄져
국제통계물리학회는 3년마다 대륙을 옮겨가며 개최된다. 10~20개의 위성학회가 본 학회와 더불어 거행되며 전세계적으로 500~1,500명의 물리학자들이 참여하는 통계물리학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학회다. 이 학회에서는 통계물리학의 선구자를 기리기 위해 볼츠만상을 수여하고 있다. 볼츠만 루트비히 에두아르트는 19세기 말 물리학자로 원자론에 입각해 기체 분자운동을 확률적인 방법을 통해 기술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 이를 통해 '엔트로피'라는 새로운 개념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 당시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볼츠만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 물리현상을 확률적인 방법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통계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했고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현재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창조에는 기존의 개념을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1975년 제12회 국제통계물리학회에서는 볼츠만상을 제정하고 첫 번째 수상자로 코넬대학교의 케네스 게디스 윌슨 교수에게 상을 수여했는데 그는 1982년 노벨상도 수상했다. 그의 업적은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상전이 현상에 대한 이론이었다. 사실 이 이론이 만들어지기까지 통계물리학자들이 이룩한 많은 선행연구가 존재하고 있었으나 윌슨 박사는 통계물리학이 아닌 고에너지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익힌 방법을 사용하고 통계물리학자들이 이룩한 선행연구 결과를 접목, 즉 융합적인 방법으로 최근 40년간 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을 창조했다. 이 이론을 기반으로 해 복잡계 등 후속 연구 분야가 지속적으로 탄생하고 발전하고 있다. 아쉽게도 윌슨 교수는 지난달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번 학회에서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특별 세션을 가졌다. 2010년 볼츠만상 수상자인 옥스퍼드 대학의 존 카디 교수는 회고담에서 윌슨 교수는 컴퓨터를 이용한 물리연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1976년에는 해변에서 소형 컴퓨터를 가지고 게임을 즐기는 세상이 곧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알렸다. 그 당시 이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여유 있는 사고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새로운 것 만들 여유와 용기 가져야
이번 국제통계물리학회에서는 필즈상을 수상한 수학자의 강연을 포함, 양자계ㆍ비평형계 등 물리 분야뿐만이 아니라 신경망ㆍ생물계ㆍ소셜네트워크ㆍ금융계 등 통계물리학의 방법론이 적용되는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 학회를 통해 참가자들은 자기 연구 분야에만 몰입돼 있었던 경직된 사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노벨상을 갈망하고 있으며 과학자는 SCI 논문 수를 늘리느라고 자기 분야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사고를 쳐다볼 여유를 잃고 있다. 이번 학회를 통해 진정한 창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사고의 전환 및 융합을 통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이러한 사고전환이 일어날 수 있는 여유와 환경이 조성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번 학회가 27년 전의 필자와 같이 젊은 학생들에게 꿈과 목표를 심어주는 학회가 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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