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도 연출도 포기했지만 연극판 떠나 행복할 자신 없어
프로듀서로 '평생 직업' 전환… 감동·깨우침 있는 연극 꿈꿔
조정래의 '아리랑' 뮤지컬화… 역사 내세운 한국적 소재 도전
배우·스태프 전원 표준계약서… 한국 뮤지컬계 도약 계기되길
"배우도, 연출도 포기하라면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연극판만은 못 떠나겠습니다. 여기 있게만 해 주십시오."(박명성 저 '뮤지컬 드림' 중에서)
극작가 고(故) 김상열 선생 밑에서 극단 '신시'의 단원으로 지내던 청년 박명성에게 연극은 인생 전부였다. 배우로 큰 빛을 못 보고 연출로 전향(?)도 해봤지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지난 1989년 첫 연출작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야심 차게 무대에 올렸건만 스승의 평가는 냉정했다. "배우는 텄다 싶어 연출을 시켰더니 그것도 젬병이군. 이걸 연극이라고 만들었어?"
배우도, 연출도 아니지만 무대를 떠나서는 행복할 자신이 없던 그는 '프로듀서'라는 역할을 떠올렸다. 1987년부터 극단의 조연출 겸 살림살이를 담당하며 해오던 기획자로서의 일은 그렇게 평생의 직업이 됐다. "프로듀서는 최초의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그 꿈 위에 살이 붙어 작품이 나오고 감동이 만들어지는 거죠. 제게 '어떤 꿈을 꾸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에서 상경했던 소년은 이제 다수의 흥행작을 보유한 국내 대표 뮤지컬·연극 제작사의 수장이 됐다. 무모하다면 무모한, 두려움 없는 '꿈꾸기'는 그러나 프로듀서 박명성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제이다. 수많은 꿈을 꾸며 대박도, 쪽박도 모두 경험한 '꿈꾸는 사고뭉치'를 자처하는 박명성(53·사진) 신시컴퍼니 대표를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만났다.
◇'아리랑'으로 또 사고 치다="박명성이 요즘 조용하다 했는데 또 사고 친 거죠." 꿈이라면 꿈이고, 사고라면 사고다. 그것도 초대형 사고. 신시컴퍼니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선보이는 창작뮤지컬 '아리랑(7월16일~9월5일 LG아트센터)'은 3년의 기획을 거쳐 5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초대형 프로젝트다.
창작뮤지컬에 도전하는 다수 제작사가 한국적 색채를 지운, 글로벌한 소재를 겨냥하는 상황에 역사를 전면에 내세운 아리랑은 모험일 수밖에 없다. 원작의 흥행과 3년이라는 장기 기획, 여기에 수십억원의 제작비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이어야 했다. "몇 년 전 제작한 뮤지컬 '아이다'에서 이집트에 끌려온 누비아 백성들이 핍박 속에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우리 민족의 아리아인 아리랑을 무대화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죠." 박 대표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까지 한민족의 끈질긴 생존과 투쟁사를 다룬 우리 민족의 역사 그 자체"라며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원작 소설인 조정래의 '아리랑'을 한 달 넘게 정독했다. 책을 읽을수록 박 대표 표현을 빌리자면 "용을 써서" 뮤지컬로 만들고 싶어졌다. 평소 멘토로 모시던 조정래 선생은 흔쾌히 뮤지컬 아리랑 제작에 박수를 쳐줬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아리랑을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계약했지만 방대한 규모가 부담이 돼 실제 작품으로 만든 적은 한 번도 없다더군요. 선생님께서 제게 '박 대표는 충분히 (아리랑의 뮤지컬화를) 하고도 남을 배포를 가진 사람'이라며 허락을 해주시는데 힘이 났어요."
◇한국 뮤지컬 도약의 계기로=아리랑은 박 대표에게 의미가 남다른 도전이다. "요즘 말로 '트렌디'하지 않고 역사적인 이야기와 부딪힌다는 것 자체로 위험한 발상일 수 있지만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봤어요."
박 대표는 이번 공연에서 최첨단 자동화 무대 같은 외형의 업그레이드에도 신경 쓰면서 국내 뮤지컬 최초로 전 출연·스태프에 대한 표준계약서를 도입했다. "뮤지컬 시장이 소수 스타 배우 위주 계약으로 돌아가다 보니 다수의 앙상블과 스태프를 많이 챙기지 못한 게 사실"이라며 "이제 한국 뮤지컬도 도덕적인 계약문화를 도입해 내부에서 잃었던 신뢰를 되찾을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열악한 처우로 실력 있는 후배들이 무대를 떠난다면 장기적으로 공연 업계의 손실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사람의 스타를 위한 공연이 아닙니다.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가 존중받아야 진정한 선진 뮤지컬이 되는 거죠."
배우에 기대하는 바도 크다. 이번 아리랑에는 김성녀를 중심으로 서범석·안재욱 등 허리급 배우들과 이창희·카이·김우형·임혜영 등 젊은 피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박 대표는 "배우에게는 참고 대상 없이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이 분명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국내 공연 시장에 있어서도 취약한 무대 메커니즘을 극복하고 질적으로 해외 명품 뮤지컬 수준으로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창작뮤지컬은 제작 시스템 전반에 있어 변화와 도약이 필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며 "이게 바로 아리랑이 도전해야 하는, 그리고 성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힘줘 말했다.
◇'신시'라서 가능한 라인업, 그리고 뚝심=신시컴퍼니 라인업에는 맘마미아·시카고·아이다 같은 흥행이 검증된 해외 라이선스 작품도 있지만 마냥 재미있는 것과는 거리 먼, 누군가는 '돈 안 된다'고 꺼릴 소재의 실험적인 연극·뮤지컬도 많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 위주의 대형 뮤지컬 제작사 틈에서 신시가 독특한 정체성을 갖는 이유다.
박 대표는 작품을 고르는 기준으로 '감동과 재미' '발견과 깨우침'을 꼽는다. "재미만 추구한다면 로맨틱 코미디나 쇼 뮤지컬만 올려야겠죠. 하지만 재미와 감동을 주면서도 너와 내가 사는 사회를 투영하고 깨우침을 주는 게 연극·뮤지컬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극장은 영혼의 놀이터이자 최고의 학교입니다. 신시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작게나마 반성이나 깨달음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섰으면 좋겠어요."
9일 열린 뮤지컬 '아리랑' 간담회에서 배우 김성녀는 이런 박 대표를 "누군가 해야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을 불도저처럼 해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맷집 키워준 '갬블러'=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작품으로 희비를 겪었다. 하나같이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지만, 1999년 올린 뮤지컬 '갬블러'는 유독 더 아픈 손가락이다. 허준호·남경주라는 호화캐스팅에 초연은 비교적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앙코르 공연 욕심에 무리하게 재공연을 추진했다. 초연이 막 내린 지 두 달도 안 돼 재연을 올린 명백한 과욕은 7억원의 손실로 돌아왔다. 그가 스승인 고 김성열 선생의 뒤를 이어 극단 '신시'의 수장이 되고 회사를 '신시 뮤지컬 컴퍼니'로 새 단장한 바로 그해의 일이다. (2009년 '신시컴퍼니'로 변경)
박 대표는 그러나 이때의 큰 시련을 대표직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겪은 게 오히려 감사하단다. "신시를 맡자마자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프로듀서 박명성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겁니다. 정신 바짝 차리게 하고 인내와 맷집을 심어준 작품이 바로 '갬블러'죠."
박 대표는 요즘 뮤지컬 프로듀서로서의 행정 경험과 노하우를 담은 책을 한 권 쓰고 있다. 제목은 '이럴 줄 알았다'란다. "앞 뒤 재고, 복잡하게 계산하면 피우려던 꽃도 쪼그라들어요. 일단 쏟아부은 뒤 흥행해도 '이럴 줄 알았다', 망해도 '이럴 줄 알았다'하고 넘기는 초연함이 중요한 거죠." 크게도 흥해보고 또 크게도 망해본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사진=송은석기자
He is… |
"출연료 거품 줄이고 라이선스 혈투 자제… 뮤지컬 시장 변화 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