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코리아 브랜드를 달고 해외로 나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죠. 하지만 이제는 한류 덕에 창업 초기부터 한국 브랜드로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시장에 직진출할 수 있게 됐습니다. 창업하기에 좋은 시기를 맞은 셈이지요. 이탈리아 창업자들이 자기 브랜드를 만들 때 시작단계부터 유럽연합(EU)을 하나의 시장으로 보는 것과 비슷한 구도입니다."
몇 년 전 '미국인 3명 가운데 1명이 한세실업의 옷을 입는다'는 광고 문구로 주목 받았고 머지않아 미국인이면 한세실업의 옷을 입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미국 의류시장을 장악한 한세실업의 창업주 김동녕(67ㆍ사진)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을 최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만났다.
이 회장은 청년실업으로 고통 받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어느 때보다 창업환경이 좋아졌다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이제 적어도 아시아 시장은 우리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중소기업, 아니 1인 기업들도 성장하기 가장 좋은 환경을 겁내지 말고 즐기십시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김 회장 자신이 청년 창업자였기 때문이다.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김 회장은 졸업 후 대학 교수와 창업이라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던 끝에 28세의 나이에 현 한세실업의 전신인 한세통상을 세웠다.
겁 없이 뛰어든 창업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자금이 막혀 부도를 겪는 고배를 맛봤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3년 뒤인 1982년 한세실업을 창업해 재기에 성공했다.
김 회장은 청년 창업자의 덕목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을 꼽았다. 그는 '한국은 IT로 성공한 나라인데 가장 큰 기반인 삼성전자나 LG전자의 자양분이 된 것이 바로 벤처기업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휴대폰 부품, 소프트웨어 개발 등 벤처기업의 노력이 현재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 꽃을 피운 셈"이라고 설명했다. 벤처기업 창업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했다면 지금의 삼성전자 등 한국 대기업들의 모습이 적어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세예스24홀딩스의 주력기업인 한세실업은 지난 30년 동안 의류제조 한길을 걸어 오는 11월 창업 30년을 맞는다. 지난해에만 1조원 가까운 물량을 수출한 알짜배기 국내 최대 의류 수출기업이다. 실제로 한세실업은 현재 미국 사람 3명 중 2명이 입는 옷을 만들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만 2억장이 팔렸는데 미국 인구가 3억1,380만명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회사를 잘 아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한세실업은 미국의 대표 브랜드 상품을 주문 받아 아베크롬비&피치ㆍ아메리칸이글ㆍ갭 등의 이름을 달고 생산하는 그림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세실업이 '그림자 놀이'에만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종국에는 H&M이나 유니클로 같은 대형 SPA(제조ㆍ유통 일괄화 의류) 브랜드를 키운다는 꿈을 꾸고 있다. 김 회장은 "훗날 SPA 브랜드와 가까운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며 "내수시장이 아닌 해외시장을 무대로 하는 브랜드가 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SPA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량생산과 이를 통한 저가정책 및 유통이 핵심이다. 한세실업은 이 같은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다. 여기에 30년간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과 제조자개발생산(ODM)을 통한 '디자인 연습'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나리오다.
한세실업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역인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공장이 분포돼 있는 여타 글로벌 SPA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ㆍ베트남ㆍ과테말라 등 7개 지역에 3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김 회장은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베트남 전체 생산량의 50%를 담당할 베트남 제3공장도 증설 중으로 완공되면 한세실업의 전체 생산능력은 20%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미얀마에도 최근 직원을 상주시키며 공장 신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즉시 본격화할 참이다.
이 정도면 국내 패션기업 중 한세실업만큼 글로벌 SPA 브랜드를 육성하기에 이상적인 인프라를 갖춘 곳도 없을 정도다.
김 회장은 앞으로 한세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기반이 될 유통 노하우를 쌓기 위해 장래가 유망한 회사 인수에 적극 나서고 있다. 브랜드 유통을 통해 쌓은 노하우와 해외 생산기지의 대량생산체제를 결합하면 성공적인 SPA 브랜드의 탄생이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자체 브랜드 유통을 위한 첫 번째 전략으로 김 회장은 지난해 2~7세 유아동 브랜드 '컬리수'의 드림스코를 인수했다. 컬리수는 국내 180개 매장에서 500억원을 벌어들이는 브랜드다. 중국에 이미 60개 매장이 최고급 백화점을 중심으로 포지셔닝돼 있다. 최근에는 7~12세 아동복 브랜드를 인수하기 위해 적당한 업체를 물색하고 있다.
무역 1조달러 시대를 맞아 일각에서는 섬유산업을 사양산업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김 회장은 이 같은 시각을 강하게 부정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지리적 영토에 갇히면 섬유는 사양산업이지요. 과거에는 저임금을 파는 산업이 섬유산업이었지만 지금은 경영 노하우를 파는 산업이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경영 노하우를 현재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전수 받을 텐데 그 전에 우리는 패션이라는 고부가가치를 파는 나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한세실업이 30년을 한길을 걸으며 굵은 뿌리를 내렸듯 김 회장은 한국 기업이 무한경쟁 속에서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안팎에서 한국이 중국계에 밀릴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이는 일부 품목에 국한된 얘기일 뿐 고난도 제품은 오히려 대만이나 싱가포르 등 중국계가 한국 업체에 밀리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한세실업의 최대 강점은 단순한 위탁생산에서 벗어나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파는 '제조자디자인생산(ODM)' 비중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원단을 개발해주지 않으면 비즈니스가 성립될 수 없다"는 김 회장은 "원단부터 시작해 풀 컬렉션을 제시해야 오더를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공장을 놀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자체 개발을 위해 한세실업은 뉴욕에 미국 현지인들로만 구성된 디자인 오피스도 차렸고 한국에는 원단개발팀와 디자이너팀을 따로 두고 있다.
미국을 손아귀에 넣은 한세실업은 2년 전부터는 유럽을 정복하러 들어갔다. 현재 유럽의 대표 SPA 브랜드인 H&Mㆍ자라ㆍ망고 옷을 만들고 있다.
과거 유럽 브랜드들은 북아프리카ㆍ동유럽ㆍ터키 등 가까운 지역에 생산기지를 두고 대량생산은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를 비롯해 대부분은 중국에서 물량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아세안 지역에 관세가 없어지면서 중국을 생산기지로 둔 브랜드들이 속속 빠져나오고 있다는 게 김 회장의 진단이다. 한세실업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 기업이 제일 먼저 중국을 뛰쳐나오고 유럽과 미국이 점진적으로 탈중국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유럽 브랜드들이 중국에서 빠져나오면서 가장 큰 수혜자가 한세실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관세가 없는 동남아 지역에 대량생산 기지를 갖추고 있는데다 30년간의 디자인 연습을 통해 5~6년 사이 10억달러의 추가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공장을 계속 짓고 있어요. 아세안 지역에서 한국 업체가 발 빠르게 포진하고 있으니 오더들의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나와 한국 업체로 옮겨오고 있는 것이죠."
한세실업과 함께 한세예스24홀딩스의 또 다른 주력기업이 인터넷서점 예스24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쌍방울ㆍ세계물산ㆍ신성 등 법정관리 의류회사를 사려다가 인연이 닿지 않던 터에 2003년에 만난 것이 예스24였다"고 김 회장은 회고했다.
다수의 의류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는 동남아 시장은 김 회장에게 무한 놀이터나 마찬가지다. 그는 예스24와 연계해 만든 인터넷쇼핑몰 아이스타일24가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기에 적절한 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예스24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으며 앞으로 싱가포르ㆍ태국ㆍ미얀마ㆍ필리핀에도 판매망을 넓힐 계획이다. 베트남에서는 올 초부터 휴대폰을 팔기 시작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영어책을 판매 중이다. 아이스타일24도 베트남에서는 패션의류 및 화장품을,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 아이돌 가수의 CD 등 한류 덕을 보고 있다.
김 회장의 경영철학은 '한걸음 늦게 가자'이다. 남보다 늦게 가자는 것이 아니라 내 실력보다 늦게 가자는 뜻으로, 회사 역량과 실력보다 앞서 가려고 할 때 실패를 부른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김 회장은 지금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항상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가'를 자문해본다. 그 덕분에 한세실업은 지난 30년간 적자를 낸 적이 없고 예스24도 인수 이듬해에 흑자기업으로 돌아섰다. 초기의 실패를 기업경영의 자산으로 삼은 그는 세계 시장에 한세예스24 브랜드를 심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1년에 30여권 읽어… '로마인 이야기'서 경영 지혜 배우죠 심희정기자 yvette@s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