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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줄 양형기준 바로잡자] <5·끝> 성범죄

'합의만 하면 관대한 처벌' 사라져야<br>강요·속임수로 '처벌불원' 의사표시했다면<br>피해자가 성인이라도 감경 사유서 배제를<br>강도·횡령보다 낮은 기준 준수율도 높여야

지난해 9월 아동 성폭력 추방을 위한 시민모임인 '발자국' 회원들과 어린이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아동 성폭행 추방을 위한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서울경제DB



'12살 여자 초등학생을 강간한 사람과 술 자리에서 홧김에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인 사람 중 누구를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하나'

지난 2011년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두 사례를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38%), '살인이 더 중하게 처벌 받아야 한다'(35.8%) 외에도 '강간을 더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응답이 26.1%나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법학 전문가들이 똑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내놓은 대답과 크게 대조된다. 판ㆍ검사와 변호사, 법학 교수 등 전문가 908명 중 61.1%는 살인을 더 엄중처벌 해야 한다고 답했고, 강간을 더 무겁게 벌해야 한다는 응답은 15.2%에 그쳤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는 살인 못지 않게 성범죄도 심각한 사회악으로 보는 최근 국민들의 '법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잇달아 발생하는 강력 성범죄를 목격하면서 사회적 분노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참혹한 성범죄가 늘어나면서 처벌 강화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단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여성이나 어린 아이의 신체와 정신을 무너뜨리는 왜곡된 성 의식은 이제 근절돼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중론이다.

대법원 양형위도 성범죄에 대해 보다 엄격하고 단호한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을 고려해 성범죄 양형기준을 지속적으로 높여왔다. 지난 2009년 4월 처음으로 의결된 성범죄 양형기준은 몇 차례 수정을 거쳐 지난 23일 최종의결 됐다.

최종 의결된 성범죄 양형기준은 아동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권고형량 범위를 높인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12월에 개정돼 오는 6월 19일 시행을 앞두고 있는 아동ㆍ청소년 성보호법 개정 내용을 반영했다.

바뀌기 전 강제추행의 범주에 있던 '13세 이상 아동ㆍ청소년 대상 유사강간'은 개정법률의 상향된 법정형을 고려해 13세 이상 강간죄 유형에 포함돼 기본 징역 5~8년의 형량이 권고되며, 최대 징역 9년까지 선고가 가능해졌다. 13세 미만 대상 성범죄 중 강간죄의 경우 기본 권고형량을 8∼12년으로 정했고 강제유사성교죄는 6∼9년, 강제추행죄 4∼7년, 의제강간죄 2년6월∼5년, 의제강제추행죄 8월∼2년으로 정했다.

아동ㆍ청소년 성 보호법 개정으로 신설된 '아동ㆍ청소년에 대한 강간 등 살인죄'는 살인범죄 양형기준을 적용해 징역 20년 이상, 무기징역을 기본 권고형량으로 정했다. 성범죄와 살인죄가 결합된 흉악 범죄에 극약 처방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강도강간죄는 기본 권고형량을 8∼12년으로 높이고, 특수강도강제추행죄는 기본 권고형량을 7∼11년으로 정했다. 강도강간죄와 특수강도강제추행죄는 법정형이 모두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으로 규정된 것에 비해 양형기준이 낮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양형위는 재판부가 가해자의 형을 정할 때 참고하는 양형인자도 일부 수정했다. 13세 미만 아동·청소년·장애인에 대한 성범죄의 경우 기존에는 속임수와 강압을 사용한 경우는 형량을 줄여줄 수 있었지만 최종안에서는 감경요인에서 뺐다. 양형위는 "외부 압력에 겁을 쉽게 먹는 피해자의 특성을 고려해 지위적 힘을 사용한 경우도 불법성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동안 양형위는 성범죄 양형기준을 두고 검토와 논의를 거듭했다. 2009년 처음 의결된성범죄 양형기준이 2010년부터 올해까지 해마다 한 차례씩 총 4번이나 수정됐다는 사실은 양형위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처럼 성범죄 양형기준이 꾸준히 높아지고, 법원의 성범죄 엄중처벌 기조가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사항이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먼저 양형기준 자체에 대해 성범죄 피해자들은 아직까지 높아진 형량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목소리를 낸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 운동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두나씨는 "종전 양형에 비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실감하지 못하겠다는 피해자들이 여전히 많다"고 전했다.

양형인자를 더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지난해 1월 양형위에 형량 감경 인자 중 하나인'처벌불원(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의 정의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들 단체는 "피해자가 성인이더라도 가해자의 강요, 속임수 등에 의해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했을 때는 감경 인자에서 배제해야 한다"며 "성인이더라도 적절한 법적 조력을 못 받으면 처벌불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현재 양형기준은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거나 장애인, 가해자의 친족인 경우만 피해자가 처벌불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같은 지적은 그 동안 피해자와 가해자의 합의가 있으면 재판부가 관대한 처벌을 내렸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피고인 중 합의를 한 경우에는 77.5%가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합의를 못한 피고인은 65.2%가 실형을 선고 받았다. 지난해 9월 열린 전국 형사 담당 법관 포럼에서 한 부장판사는 "피해자와 합의가 되는 순간 집행유예가 원칙이 되고 실형이 예외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양형기준 외적인 측면에서 일선 재판부가 높아진 양형기준을 잘 지키는 것도 숙제로 남는다. 양형위가 발간한 연감에 따르면 지난 2011년 성범죄 양형기준 준수율은 79.1%로 살인죄(89.7%)나 강도죄(91.3%) 등 다른 범죄보다 준수율이 낮았다. 이는 양형기준 적용대상 비율이 성범죄(69.3%)보다 낮은 횡령ㆍ배임범죄나 무고죄의 양형기준 준수율이 각각 92.7%, 97.4%인 것과 비교해도 낮은 수치다.

일선 재판부가 높아진 성범죄 양형기준을 적용하며 안게 된 실무적 부담을 극복하는 일도 과제로 남게 됐다. 서울지역 법원 한 부장판사는 "권고형량이 높으면 아무래도 유ㆍ무죄에 대한 판단을 더 엄격하게 할 수밖에 없다"며 "증거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형량 못지않게 재판의 질 역시 높여야 강화된 양형기준이 더욱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 수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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