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세계에서 힘이 있는 중앙은행은 아니다. 환율을 움직일 글로벌 헤게모니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한은이 세계 환율시장에 힘을 과시(?)한 적은 한 번 있다.
지난 2005년 2월 한은은 국회 업무보고서에 외환보유액 다변화와 관련, 한 줄짜리 문장을 넣었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로 달러가치가 연일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환보유액 투자 대상 통화를 다변화하겠다'는 내용이다. 국제금융시장은 이를 한은의 달러 매도로 받아들였고 우리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도 달러 매각에 나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너도나도 달러를 투매했다. 이른바 BOK(Bank Of Korea) 쇼크다. 놀란 한은은 즉시 "통화 다변화에 나설 의사가 없다"고 밝혀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BOK 쇼크는 지금도 회자된다.
다만 냉정히 곱씹어보면 BOK 쇼크는 한은의 단독 플레이는 아니었다. 해석이 과장된 측면이 있었고 '묘하게' 조건이 맞아떨어졌다. 2005년 세계금융시장에는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미국 달러화 비중을 줄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운용 외환보유액이 2,000억달러(4위)가 넘는 한은이 달러화 비중을 줄이겠다는 '증거' 하나를 내보이자 시장이 흔들렸다. 더욱이 한국을 둘러싼 일본·중국·대만은 나란히 1~3위의 외환보유액 국가였다. 서구에서 볼 때는 충분히 '초록은 동색'일 수 있었다.
BOK 쇼크의 기억이 흐릿해진 2014년, 세계는 중앙은행의 전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주요 국가들은 막대한 돈 풀기에 나섰고 '환율전쟁'의 포연도 짙어졌다. 물론 환율전쟁을 촉발한 미국은 양적완화(QE)를 6년 만에 끝냈다. 그 바통을 일본과 유럽연합(EU) 등이 이어받았을 뿐이다.
주목할 것은 미국이 떠난 뒤 일본과 EU의 돈 풀기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사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초 '돈을 풀어서라도 디플레이션을 벗어나겠다'는 일본의 아베노믹스에 대해 "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드는 정책"이라고 성토했다. QE가 갖는 부작용, 즉 '인접국 궁핍화 정책(beggar my neighbor policy)'을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지난달 31일 경기부양을 위해 매년 80조엔까지 자산매입 규모를 확대하겠다는 발표를 한 데 이어 마리오 드라기 유럽은행(ECB) 총재가 "추가부양 준비를 지시했다"고 밝히자 IMF는 7일(현지시간) "적절하고 합당한 조치"라고 평했다.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통화정책을 묵인하거나 지지하겠다는 얘기다.
강대국이 환율전쟁을 일으키면서 외환시장은 출렁이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위기의 진원지가 되고는 했던 초엔저에 대한 우려감은 잔뜩 커졌다. 주형환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6일 "엔화와 원화가 동조화해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고 하루 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엔화 약세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구두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장은 못내 불안해 한다. BOK가 글로벌 시장에서 흐름을 주도할 힘을 갖고 있지 않은데다 가계부채 문제와 자본유출 등도 걱정해야 해 방어수단을 막 꺼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행(BOJ)이 내놓은 통화완화정책에 대해 시장은 '구로다 풋(일본 중앙은행 총재가 통화완화로 경기부양 추진)'으로 평했다. 이래저래 수단이 마땅치 않은 이 총재는 어떤 '풋'을 구상하고 내놓을지 시장은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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