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소비되는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시대별로 문화 양식의 변천사를 짚은 책이 출간됐다. 저자는 영국 런던대학교의 유럽비교사 교수인 도널드 서순으로, 1800년부터 2000년까지 최근 200여년간 유럽과 러시아ㆍ미국의 문화 콘텐츠가 변모한 발자취를 추적했다. 책은 부유층이 사치스럽게 즐긴 고급문화부터 하층민의 고된 삶을 위로해 준 저급문화, 20세기 문화의 주역인 대중문화까지 폭넓게 조망하고 있다.
1800년에는 유럽인 대부분이 읽거나 쓸 수 없었고, 책을 사거나 빌릴 돈도 없었다. 단지 귀족과 중간계급 소수의 특권에 불과했던 문화가 지난 200년의 기간 동안 '대중'에게로 확산된 것. 우선 저자는 무엇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구분하는 잣대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유럽 문화가 산업화 이전 단계를 벗어난 1800년 이후에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구분 자체가 대중시장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하나의 마케팅 행위"라고 저자는 분석했다.
한때 소설은 격이 떨어지고 독자를 타락시키는 저급 장르로 여겨질 때가 있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세르반테스,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의 등장으로 '싸구려 문학'이라는 이름을 떨치고 '고전'으로 올라섰다. 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는 혁신적인 발명품이긴 했지만 목소리를 넣어놓는 녹음 기계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후 음반사의 마케팅 전략과 결합하면서 비로소 축음기는 유럽 음악사에 굵은 획을 남겼다.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던 클래식 음악을 축음기 레코드판으로 만들어 중산층 가정에도 '그들만의 공연'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문화 콘텐츠를 생산ㆍ소비하는 과정에서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달라졌다. 18~19세기 출판업자가 등장하면서 책을 읽는 대중이 사회 계층으로 자리잡았고, 인쇄업자가 악보를 찍어내면서 중산층 가정에서도 피아노 연주가 인기를 끌게 됐다. 19세기에 영화 콘텐츠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본격적인 대중연예 시대가 열렸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책은 1권 '서막', 2권 '부르주아 문화', 3권 '혁명', 4권 '국가', 5권 '대중매체'로 나뉘어 출간됐다. 저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사업으로서의 문화, 직업으로서의 문화'에 초점을 맞춰 문화 변천사를 서술했다. 그러나 미술시장 만은 '상대적으로 한정된 엘리트가 예술이라고 규정한 물건을 매매하는 투기적인 시장'이라는 이유로 분석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각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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