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로 이주열 전 부총재가 내정됐다. 선거공신과 모피아 낙하산 설로 뒤숭숭했던 금융계는 '정통 한은맨'의 등장에 내심 안도하는 분위기다.
적격 여부는 다음주에 판가름난다. 바뀐 국회법에 따라 이제 한은 총재도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세간에 후보자가 전임 김중수 총재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다른 개혁안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조직 보위를 위한 처세였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고위공직자의 도덕성과 자질은 기본이고 통화신용정책의 수장으로서 혁신의지와 비전·소통능력이 검증돼야 한다.
현재 국내 경제 여건은 가계부채 1,000조와 국가채무 2,000조의 늪에 빠져 있고 정부는 세수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국제금융 상황도 미국과 중국·일본 그리고 신흥국에 이르기까지 안갯속이다.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한은의 기능으로 국내외 경제여건 점검, 금융시장 안정성과 금융시스템 건전성 감독기능이 중시됐다. 일종의 조기경보기 역할을 맡긴 건대 매년 수천억원대 금융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고 낙관론에 빠진 부정확한 경제전망은 시장의 불신만 키워 왔다. 오죽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결정문보다 기획재정부의 그린북을 더 신뢰한다"는 애널리스트의 푸념까지 들린다. 민생안정과 서민경제의 질적 발전이라는 시대정신에 맞도록 한국은행의 적극적인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100년 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독립성 확보에 50년을 쏟았고 이후 50년간은 책임성 실현을 과제로 노력하고 있다. 국민들이 한은 독립 서명운동을 벌이던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미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국회에서 한국은행법이 15차례나 개정됐는데 언제까지 정부의 열석 발언권에 휘둘리는 '남대문 출장소' 신세 걱정을 해야 하는 건지 개탄스럽다.
이제는 조직의 독립성을 넘어 역할의 책임성 강화로 진일보해야 할 때다. 문제는 한은이 국가기관도 공기업도 아닌 무자본특수법인이다 보니 조직문화도 이도저도 아닌 복지부동의 기풍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정부와 민간에 끼인 존재, '무소속 특수 직장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은은 3,50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이다. 신임 한은 총재는 공공성과 책임성 진작을 위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한은의 신뢰회복을 위한 해법은 바로 소통에 있다. 소통은 내부에 '커뮤니케이션국'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청와대와 대기업 눈치는 덜 살피더라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봉급생활자 등 서민의 살림살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국회에는 금리조정을 담당하는 금융통화위원에 각계각층의 대표를 포함하는 내용의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이 법안을 시행하는 것이 소통의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한은이 과연 국민과 국회·시장과 소통하는 중앙은행으로 거듭날 것인지, 사상 최초로 실시되는 한은 총재 인사청문회가 기다려진다. 국민에게 신뢰받고 국회의 존중을 받으며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새로운 한은이 이 내정자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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