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 연구단지는 앞으로 30~50년 이상을 내다보고 민간기업·시민·지역사회를 모두 아우르는 쪽으로 발전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서울의 동북권 도시 발전과 연계해 외국의 선진 과학자도 유치할 수 있는 장소가 돼야 해요. 홍릉이 미래 도약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게 큰 그림을 정말 잘 그려야 합니다."
이병권(57·사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은 최근 서울 홍릉 본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발전의 산실인 '홍릉'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홍릉단지 내 일부 공공기관 이전에 따라 최근 핫이슈로 부상한 홍릉 개발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KIST의 새로운 청사진도 소개했다. 대표적 예로 연구개발 융복합의 일환으로 내년 1월 출연 연구기관으로는 최초로 '로봇전문연구소'를 설립한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최근 이슈인 국가 연구개발(R&D)의 문제점과 관련해서는 과제평가 시스템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릉단지, 도지재생형 클러스트로
사실 이 원장에게 KIST와 홍릉은 청춘을 보낸 곳이다. 지난 1982년부터 무려 32년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머물고 있어서다. 어느 누구보다도 홍릉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홍릉단지는 1966년 KIST 설립 이후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과학기술과 경제·산업 등 다양한 분야의 국가 싱크탱크가 밀집했던 제1의 연구공간이었다.
그러나 참여정부 때 추진된 국토균형개발정책으로 단지 내 5개 공공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돼 연구단지 기능 상실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7월 KIST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홍릉단지 활성화 방안 수립을 지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할 예정이지만 아직 방향성이 확실하게 설정된 것은 아니다.
이 원장은 이에 대해 "홍릉단지가 앞으로 도시재생형 클러스터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장기적 관점의 계획 수립 △시민·민간기업·지역사회 통합형 공간 구축 △주변 기반시설·정주여건 개선 등을 포스트 홍릉시대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는 "홍릉단지 활용과 관련해 서울시·기획재정부·미래창조과학부 등과 함께 KIST도 적극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며 "홍릉 연구단지가 도시재생형 클러스터로 거듭나면 이는 세계적 발전 모델이자 히트 상품도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 원장은 특히 홍릉의 미래에 대해 적극적인 글로벌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지방에 이전한 연구기관의 경우 아무래도 우수한 외국인 학자들을 유치하기 어려운 만큼 서울 유일의 연구기관이 역할을 앞장서 해야 한다는 복안이었다.
아울러 최근 정부 R&D 투자의 비효율성에 대한 논란이 거센 가운데 해외 선진 과학자들이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홍릉단지에 외국의 선진 과학자들을 입주할 수 있게 해 그들의 (R&D) 성공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로봇연구소 설립…KIST 새 역할 찾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KIST의 방향은 무엇일까. 이 원장은 "KIST가 변해야 출연연이 바뀌고 이어 나라가 바뀔 수 있다고 본다"며 "특히 연구수행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려 한다"고 강조했다. 핵심은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융합과 협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일환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만의 특수성이 집결된 로봇 분야 전문연구소를 내년 1월1일자로 설립한다"고 소개했다. 대학과 달리 출연연에서 로봇전문연구소를 따로 만드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 원장은 "새로 만들어질 로봇연구소에는 기계공학·전자 등 각종 전공 분야의 박사급 인력 30여명을 포함해 엔지니어까지 총 40~50명이 투입될 예정"이라며 "단순히 로봇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봇 플랫폼 기술로까지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으로 염두에 둔 것이 중소기업 지원 역할 강화다.
그는 "중소기업이야말로 국가의 지속 성장동력"이라며 "관련사업을 적극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단 무분별한 중소기업 지원보다는 KIST가 가장 경쟁력을 갖춘 연구 분야에 사업을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K-클럽'. 이 제도는 창업 초기 기업을 중견기업으로까지 키우기 위한 KIST의 프로그램이다. 이 외에 원천기술 플랫폼 사업, 특허 무상이전 등 다양한 방식의 지원모델을 발굴해나간다는 전략을 세웠다.
중소기업 지원뿐 아니라 창업과 관련해서도 이미 창업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외부 전문가를 고용해 기술만 전수하는 신개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원에서는 원천기술만 제공하고 사업은 관련 능력을 가진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는 창업지원 사업이다. 그동안 연구만 하던 학자가 기술만 들고 나가 사업을 시도했다가 대부분 실패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원장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 5월부터 채용을 진행해 현재 고감도 벤젠계 유기화합물 측정 센서, 지능형 실시간 용접결함 감지 기술, 의공학 관련 기술 등 3명의 기술창업 전문위원이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기술창업 위원들은 연구원들의 기술자문·전문인력·첨단장비·특허 등을 활용할 수 있으며 창업활동비도 일부 지원된다.
이 원장은 "사업은 자금·영업능력이 따라줘야지 원천기술만 갖고는 성공할 수 없고 실제로도 연구자가 창업에 성공한 케이스가 거의 없다"며 "이스라엘의 바이츠만연구소의 경우도 창업은 금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부에서 독일 등 해외 선진 연구소 체계를 롤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출연연과 그들은 지원체계가 매우 다르다"며 "KIST도 우리만의 독자적인 연구소 모델을 만드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설명했다.
R&D 평가 시스템 바꿔야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핫이슈 중 하나인 국가 R&D 부진이다. 그는 이에 대해 '과제평가 시스템 정비'를 우선 해결해야 할 숙제로 지적했다. 이 원장은 KIST 역시 논문 수 등 양적 지표는 해외 선진 연구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아직 질적 지표에서는 차이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분석했다. 일방적인 논문·특허 위주 평가보다 기업 활용도 중심으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
이 원장은 "예전에는 논문마저 적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다"고 전제한 뒤 "논문 수가 과거보다 수십배나 늘었지만 실제 산업체와 연결되는 사례가 적다는 지적에 깊이 공감하며 그래서 과제평가 시스템을 새로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의 논문 위주 평가 시스템 정비가 가장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이 원장은 정부의 R&D 정책이 지금보다 좀 더 일관적으로 유지돼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강조했다. 과학 관련부처 조직과 수장이 끊임없이 바뀌는데다 핵심 사업 내용도 몇 년 단위로 변하니 현장에서 연구자들이 느끼는 혼란이 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연구과제가 과학의 논리를 벗어나다 보니 정책 입안자나 연구자 모두 평가를 잘 받는 연구에 몰리고 가시적 단기성과에 매달리는 등 조급증만 증폭된다는 외부의 비판과 상통하는 지적이다.
이 원장은 "기초연구의 경우 한번 투자했으면 오랫동안 기다려줘야 하는데 한국은 아직 그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 못 나온 이유도 이와 관련돼 있지 않나 싶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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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욱기자
대담=이종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