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러츠와 트리플 플립, 플라잉 카멜 스핀과 체인지풋 콤비네이션 스핀…. 들어본 적도 없고 들을 일도 없었던 피겨 용어를 우리 국민은 김연아(24) 때문에 알게 됐다. 동계스포츠의 꽃이라지만 김연아 이전에 우리 국민에게 피겨는 그저 다른 나라의 화려하기만 한 종목이었다. 김연아 때문에 가슴 졸였고 김연아가 있어 행복했던 순간들을 이제는 추억으로 간직해야 한다. 21일 오전(한국시간)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스케이팅팰리스에서 열린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싱글 프리 스케이팅. 김연아는 19년 피겨 인생을 그대로 담은 표정으로 '아디오스 노니노' 선율에 맞춰 선수로서의 마지막 연기를 펼쳤다.
◇여섯살 때 찾아온 세렌디피티=여섯살이던 지난 1996년 과천 실내아이스링크. 김연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빙판에 섰다. 김연아는 피겨와의 첫 만남을 '세렌디피티(전혀 뜻밖의 행운)'라고 돌아봤다. 아버지 김현석씨와 어머니 박미희씨의 손을 잡고 빙상장에 놀러 간 김연아는 그곳에서 피겨를 배우는 초등학생들을 보고 뭔지 모를 설렘이 들었다고 한다. 그 설렘 때문에 강습반에 들었고 군포 신흥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선수의 꿈을 키웠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 은메달리스트 미셸 콴(미국)의 연기를 비디오로 반복재생하는 것이 그때의 습관이었다.
◇짜릿했던 트리플의 추억=빙판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걸음도 빨리 뗀 김연아는 3회전 점프도 빨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 콜라라도 전지훈련에서 처음 성공했다. 트리플 토루프(왼발을 찍어 도약해 3회전)였다. 와이어를 달고 도는 반복연습에 몸이 끊어져 나갈 것 같았고 완벽한 구사를 위해 줄넘기 2단 뛰기를 연속으로 70차례 뛰어야 했지만 김연아는 포기를 몰랐다. '오늘 성공 못하면 집에 안 간다'는 무서운 끈기는 엄마도 말리지 못했다.
◇포디엄의 여왕=김연아가 놀라운 것은 처음 세계대회에 출전한 2002년부터 단 한번도 시상대(포디엄)에서 밀려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2002년 4월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트리글라브 트로피대회 13세 이하 부문에서 '캉캉(쇼트 프로그램)'과 '동물의 사육제(프리 스케이팅)'로 우승한 후 김연아는 금메달을 '밥 먹듯' 수집했고 못해도 동메달이었다. 2003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혀 2006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연아는 올림픽 금메달을 포함, 그때부터 10년 가까이 여왕의 위엄을 지켰다.
◇발목·허리에 고관절까지…부상의 역사='다른 선수들보다 고난도 기술을 구사하는 김연아에게 부상은 숙명과도 같았다. 그러나 김연아는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발목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입고는 피겨를 그만두기 직전까지 갔었다. 2006년 말부터는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허리가 너무 아파 훈련하는 시간보다 빙상장 펜스에 기대 얼굴을 파묻고 고통을 견뎌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하지만 김연아는 오전8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훈련을 강행했고 시니어 무대 첫 그랑프리 파이널(2006년 12월)과 세계선수권(2007년 3월)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다. 2008년에는 고관절 부상 탓에 진통제를 맞고 세계선수권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부상 투혼으로 두 차례 3위를 한 뒤 나선 세 번째 세계선수권(2009년). 여자싱글 사상 최초로 200점을 돌파하며 끝내 '월드챔피언'이 된 김연아는 그간의 부상 설움을 감격의 눈물에 쏟아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번 올림픽에서의 성과도 지난해 9월 입은 오른발 부상을 극복하고 이뤄낸 것이라 더욱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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