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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2, 7, 12, 17, 22, 27일 여섯번 서는 안성 5일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삼남지방의 온갖 물화가 모이던 옛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됐다. 객주(客主)·여각(旅閣)·도가(都家)가 즐비하던 옛 시장터 성남동·창전동·낙원동 일대는 주거지로 변했으며 5일장이 서는 안성농협 하나로마트 앞, 고속버스터미널 뒤, 새 시장과 금산로터리 주변도 다른 시골시장처럼 별다른 상품이 없다.
보부상·객주 몰리던 조선 3대시장
그래도 안성 사람들은 자부심을 잊지 않고 있다. 안성이 옛날에는 개성·수원과 더불어 또는 대구·전주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으로 손꼽혔기 때문이다. 천자문(千字文) 뒤풀이에도 '이틀 이레 안성장에 팔도 화물 벌 열(列)'이 나오고 '안성장은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보다 두 가지가 더 있다'는 말도 있었다. 더 많았다는 2종의 상품은 농기구인 써레와 도작용 모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개성·수원·안성 사람들을 가리켜 '발가벗고 팔십리를 뛴다'는 말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그만큼 이재와 상술에 밝고 억척스럽다는 뜻이었다. 전원지대 안성이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울과 삼남지방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성장에는 서울·경기지방으로 올라오는 삼남의 물산이 보부상 봇짐, 등짐과 소바리, 말바리로 모여들었고 이에 따라 팔도 사람들이 상리(商利)를 좇아 들끓었다.
안성천을 젖줄 삼은 기름진 곡창인 데다가 사통팔달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한 안성. 전국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컸던 안성장의 명성을 높여준 대표적 상품은 '안성맞춤'의 유래가 됐다는 명물 안성유기, 그리고 가죽과 한지를 원료로 한 수공업 제품이었다. 그래서 이런 속요도 생겨났다. '경기 안성 큰아기 유기장사로 나간다.' '경기 안성 큰아기 숟가락장사로 나간다.' '안성유기 반복자 연엽주발은 시집가는 새아씨의 선물감이다.' '안성 갖신(가죽신·꽃신) 반저름(半油鞋)은 시집가는 새아씨 발에 맞춤이라.'
놋그릇·가죽신·종이신·담뱃대·갓·한지·북 같은 수공품도 품질 좋은 종류가 다양했지만 안성장은 농산물 집산지로서 숱한 물상객주가 몰려들어 도가를 차렸다. 하지만 객주와 여각이 즐비하던 창전동은 '먹자골목'으로 변했고 성남동 낙원동도 한적한 주택가로 변해 옛날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다.
옛 난전터 안성천변에도 희미한 옛 그림자가 남아 나그네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수천수만 군중이 옷깃을 비비고 몸을 부딪치며 삶의 애환을 교직(交織)하던 그 자리에는 병아리·오리새끼·개·염소·고양이·닭을 파는 사람들만 영화롭던 시절의 편린처럼 남아 있다.
개화 후 쇠락 옛 영화 편린만 남아
이른바 개화의 바람을 타고 거세게 밀어닥친 근대화의 물결이 안성장의 영화를 휩쓸고 가버렸다. 광무 9년(1905) 개통된 경부선철도가 이웃 고을 평택을 거쳐 감으로써 안성장시로 몰리던 소바리·말바리는 열차 화물로 변해 자취를 감췄다. 신작로도 안성을 비껴 평택을 거쳐 닦였다. 보부상의 발길이 장날마다 뜸해지고 물상객주도 하나둘 오랜 터전을 떠나갔다. 그렇게 해 번성하던 안성장은 침체 쇠퇴의 길을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많은 장꾼이 쏟아져 내리던 안성역도 사라졌다. 1925년에 개통됐던 안성∼천안 간 28.4㎞의 안성선이 적자노선으로 버림받아 지난 1989년 1월1일에 폐선됨으로써 이 육지의 항구도 불 꺼진 폐항 신세가 됐던 것이다. 철마가 사라진 궤도를 타고 바람이 달린다. 쓸쓸한 바람결에 풍물 남사당패 안성 청룡 바우덕이를 그리는 노래라도 한 자락 들려올 듯하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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