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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 나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떠올린 것은 생뚱맞은 일일 것이다. 영화를 볼 때는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에 잠겨 옆에 안주인이 있는 것도 잊었다. 영화는 삐삐ㆍCD플레이어 등을 소품으로 넣어 시대배경이 지난 1990년대임을 알렸다. 영화관을 나와 첫사랑에 빠졌던 1980년대 대학가를 생각해봤다. 터지는 지랄탄, 매캐한 연기, 저벅저벅 군화소리… . 첫사랑의 소품으로는 참 어울리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그 모든 소품을 가져다 놓은 사람, 전 전 대통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임 대통령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걸 조사하다 보니 대통령이 됐다. 그런대로 실패하지 않고 끝난 게 감사하다. 권력 남용 없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다."
얼마 전 이분이 예일대 경영대학원생들과 만나 한 얘기다. 함께 자리한 이순자 여사는 "우리나라 먹고사는 기초를 이 양반이 계실 때 다 만들었다"라는 말도 했다.
이런 걸 허무개그라고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터무니 없는 말로 남을 웃기고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고차원 개그다.
"총칼로 사람을 죽이다 보니 대통령이 됐다. 국민에게 맞아 죽지 않고 끝난 게 감사하다. 혼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사회가 5공화국 사회다" 이렇게 진실을 얘기하면 개그가 되지 않는다.
이 여사도 "우리 부부 먹고사는 기초를 그때 기업들에 뜯어서 다 만들었다"라고 대사를 바꾸면 개그가 되겠는가.
사회 고위층 진실왜곡에 헛웃음
그분들은 아마도 당신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연기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이영호 전 청와대 비서관은 호통 개그를 선보였다.
"자료 삭제에 관한 한 제가 바로 몸통, 몸통, 몸통이니 저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몸통'을 세 번이나 힘줘 말할 때 그가 내보인 결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기자회견 내내 호통으로 일관했다. 기자회견이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한 걸 보면 그는 국민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자기가 몸통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국민이 그렇게 믿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 순간 이제껏 민간인 불법사찰을 국무총리실이 저지른 일로 알고 있던 국민은 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호통 개그에 이은 반전 개그의 진수다.
이런 게 바로 개그라는 것을 안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현철씨 뉴스부터다.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그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맹비난했다. "아버지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초산테러를 당하고 그것이 유신정권의 붕괴를 재촉했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런 정치 테러(공천 탈락)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만 했으면 개그가 아니었다. 그가 "아버지가 격분하고 계신다"고 한 순간 개그 대박이 터졌다.
코흘리개 어린이가 동네에서 골목대장한테 맞은 다음 울면서 하는 말이 바로 이거다. "아빠한테 이를 거야."
궁금한 것은 현철씨가 진짜로 아빠한테 일렀는지의 여부다.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 같던 그는 갑자기 출마를 접었다. 아빠한테 일렀다면 이제 아빠 힘이 예전 같지 않아 골목대장도 혼내주지 못할 정도가 된 거다.
신문은 옛날부터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많이 싣는다. 나쁜 소식을 가만 들여다보면 개그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개그는 개그일뿐 그걸로 끝내자
요즘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전 전 대통령, 이 전 비서관, 현철씨뿐만이 아니다. 판ㆍ검사를 조사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서더니 종이 몇 장 받고서는 무혐의로 수사를 종결한 경찰은 어떤가. 사실 처음에는 조사할 생각도 못하다가 여론이 질타하니 만용을 부린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강용석 국회의원 후보자, 석호익 국회의원 후보자, 소설가 복거일씨… . 신문을 보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열거될 때 알아차렸을 거다. 여성 관련 발언으로 색 개그를 한 분들이다.
개그는 개그일 뿐 그걸로 끝내야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건강에 해롭다. 개그맨들의 선의를 생각하고 그저 즐기면 될 일이다. 그나저나 개그 콘서트 제작진은 이 가공할 경쟁자들에 대해 연구 많이 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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