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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안개·수증기… 물에 대한 사유

중견작가 이기봉 개인전

이기봉의 ‘지속되기 위하여-기억’

파란 수조 안에 하얀 책이 떠다닌다. 헤엄치듯 움직이는 책은 마치 나비의 부드러운 몸짓을 보는 듯하다. 어떤 의미를 가진 작품인지 음미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더라도 아름다운 색채나 우아한 움직임이 시각적 만족감을 준다.

중견작가 이기봉(55ㆍ고려대 교수)의 설치작품으로 제목은 '독신자-이중신체(Bachelor-The Dual Body)'다. 특히 남성 독신자를 뜻하는 이 제목의 단어는 초월자와 소통하는 성직자를 가리키는 동시에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술가를 은유하는 의미로 사용돼 왔다. 이기봉 작가 역시 이 작품을 두고 "자화상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욕조에서 독서하는 게 취미인 그가 어느 날 실수로 책을 떨어뜨렸는데, 젖어 '죽게 된' 책이 물 안을 떠다니며 헤엄치는 모습에서 역설적이게도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몸짓'을 봤고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2003년작인 이 작품은 이후 스페인ㆍ중국 등에서 열린 비엔날레에 초대돼 작가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더욱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미술관이 '2012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로 이기봉을 선정해 '흐린 방(the Cloudium)'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1986년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래 서정성과 개념성을 동시에 갖춘 독특한 작품으로 꾸준히 활동 중인 작가다.

또 다른 주요 출품작으로 '감각기계(Sens Machine)-자라는 수직'과 '감각기계-자라는 수평'도 전시돼 있다. 안개로 가득 찬 검은 수조 안에서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하나는 왼쪽 끝에서 가운데로 붉은 레이저 빛이 쏟아지고 있다. 바늘처럼 짧고 가느다란 한줄기 빛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느린 속도로 맞은 편 벽을 향해 자라난다. 2~3m짜리 수조통의 끝까지 닿는 데는 약 40분 정도.

2층 전시장에는 무수한 글자들이 적힌 9m*5m짜리 대형 탁자 위에 하얀 거품들이 퍼져 나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설치작품 '클라우디움(cloudium)'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처럼 '21세기형 몽상가'라 불리는 이기봉의 작품세계는 물ㆍ안개ㆍ수증기 등을 탐구하는 '물에 대한 사유'와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구조', 세련된 형식미를 보여주는 재료의 감각적 활용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아르코미술관의 고원석 큐레이터는 분석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대표작인 평면회화 3점을 비롯해 총 9점의 작품만을 선보였지만 다작(多作) 못지않은 강렬함과 사색의 긴 여운을 전해준다. 전시는 7월15일까지. (02)760-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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