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즈음의 헤르만 헤세는 사회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위기에 몰렸다. 급기야 신경쇠약으로 고통받고 기어이 요양소까지 들어간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융은 그에게 그림 그리기를 통한 치료를 권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헤세는 3,0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리며 '데미안'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 같은 최고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10년 후 편지에 헤세는 이렇게 썼다. "그림을 그린 첫 시도들이 나에게 위안을 주어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구하지 못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살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집안 반대로 미술을 포기했지만, 변호사를 거쳐 결국 소설가가 된 저자 도널드 프리드먼은 이 책에서 익숙한 시인·소설가들의 문학작품이 아닌 그림을 보여준다. 이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루이스 캐럴이나 '어린 왕자'의 생텍쥐베리처럼 작품 속 삽화를 직접 그려 잘 알려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화가로서의 작업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다. 대개 '일요화가'(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였고 좀 나아봤자 자신들의 글에는 못 미쳤다.
하지만 기교의 부담이 없는 이 그림들은 작가 내면의 자아에 좀 더 가깝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앙드레 브르통과 자크 프레베르의 초현실적 이미지, 조지프 콘래드의 요염한 여성 펜화, 나보코프의 정밀한 나비 그림, 헨리 밀러의 유쾌한 수채화. 작가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기도 배반하기도 하며 색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요한 볼프강 괴테에서 피터 색스까지 100여명의 동서양 작가와 그들의 그림을 선정하며 철저히 주관적으로 접근했다. 심지어 3분의1 정도는 작품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인지도가 낮은 이들로 채워졌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발견하는 기쁨'을 발견했고, 심지어 이를 독자와 나누기 위해 작가 순서를 알파벳 순서로 배치했다.
어린 시절 만화가를 꿈꿨던 '달려라 토끼'의 존 업다이크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눙쳤다. "너무나 많은 작가들이 드로잉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어차피 도구도 같고 충동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3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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