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 타결이 임박했던 지난달 중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내각회의에서 장관들에게 1994년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핵 합의 당시의 영상을 보여줬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합의 직후 "북한은 평화로운 핵기술을 보유하게 되고 한국 등은 북핵 위협에서 보호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장면이었다. 미국의 이란 핵 협상에 반대해온 네타냐후 총리가 미국 외교정책의 실패 사례로 북한 핵 문제를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제네바 합의란 미국이 북한과의 오랜 협상을 통해 핵을 동결하는 대가로 경수로 2기를 세워주고 연간 50만톤의 중유를 공급하겠다는 국제사회의 과감한 지원 약속이었다.
하지만 제네바 합의는 과거 개발한 핵 폐기 등 핵심을 비켜 간 미봉책에 머물렀다. 북한은 한국으로부터 건네받은 시멘트와 콘크리트·철근 등의 자재와 중장비를 군수 목적으로 전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북한으로서는 제네바 합의를 통해 시간도 벌고 필요한 물자까지 받아 명분과 실리를 한꺼번에 챙긴 셈이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남측을 겨냥해 '서울 불바다'를 거론하며 협박을 일삼았고 국내에서는 라면 등 생필품 사재기 소동까지 벌어졌을 정도다. 미국이 한때 북폭계획까지 검토했다지만 무엇보다 대남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을 북한 당국이 간파했던 탓이다.
남북 당국이 43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8·25 합의'라는 것을 내놓았다. 제네바 합의 당시 미 항공모함까지 동원됐던 위기 상황이나 북의 벼랑 끝 전술 등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한껏 위기를 조성하고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반복된 것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주고받은 조건이야 없다지만 북한이 우리 측에 식량 지원을 비롯해 금강산 관광 재개와 5·24 대북 제재 해제 등의 대가를 요구하고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뒤집고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북한 도발의 판돈만 키워주지 않을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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