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 여자 키가 크다'거나 '너무 많이 기다려서 지루했다'라는 표현은 애매모호지만 이에 비해 '175cm'이나 '2시간'은 확실하다. 어쨌던 우리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저자인 게르트 기거랜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숫자도 반드시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은 살인죄로 체포돼 재판정에 섰다. 당신의 DNA가 희생자의 옷에서 찾아낸 DNA 흔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치가 우연히 일어날 확률은 10만분의 1입니다"라는 증언만 듣고도 당신은 곧 중형을 받게 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전문가가 똑같은 정보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면 어떨까. "10만명 중의 1명꼴로 우연한 DNA 일치가 관찰됩니다." 설명대로라면 꽤 많은 사람이 살인자로 의심받을 수 있다. 서울의 인구가 1,000만명이니까 피해자에게서 발견된 DNA 표본과 일치하는 사람이 이 도시에 100명 이상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제 DNA '일치'라는 증거는 당신을 유죄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렇듯 숫자를 말하는 방식을 바꿔보면 진실이 보인다고 기거렌처는 설파한다. 그는 "기술에는 심리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대단한 기술이라고 해도 그것이 품은 불확실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착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될 경우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계의 거장이자 '올바른 선택'에 관해 꾸준히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험과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는지를 밝히고 그 해결책을 내놓는다.
이 책은 총 3장으로 나눠졌다. 1장에서 먼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확실성에 대한 환상, 위험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고 그런 착각을 부추기는 너무나 거대한 집단들에 대한 공포가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한 자각을 불러온다. 2장에서는 앞서 던질 질문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고 자답한다. 특히 유방암 검진, 에이즈, 폭력, 재판, DNA 지문,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한다. 10명중 1명은 유방암에 걸린다는 대중화된 문장에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는 공포를 느껴왔는지 이야기하고 유방암 검진의 불확실성에 대해 까발린다. 3장에서는 계산맹(盲)의 상태가 어떻게 악용되는지, 숫자를 읽을 줄 아는 몇몇이 그렇지 않은 우리를 얼마나 쉽게 속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물론 이 책이 '내가 바보였구나'하는 상실감만 남기고 끝내지는 않는다. 저자는 실제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1~2시간 동안 표현방법을 확률에서 자연빈도로 바꾸는 방식을 알려주고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을 테스트했다. 그 결과는 정말 놀라운데 겨우 10% 정도였던 정답률이 90%로 올라갔다. 이렇듯 그가 지적한 위험들에 비해 해결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실행하기 쉽다. 단지 어려운 표현 방법을 버리고 마음이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방식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면 도처에 산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스스로를 신뢰하지만 숫자에 약하다고 생각한다면, 합리적이라 생각했지만 잘못된 판단을 한 적이 있다면, 잘못된 소통으로 피해를 본 적이 있다면, 아니 그 누구라도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 받은 적이 있다면 일독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값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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