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소비시장 규모가 크지 않지만 유럽연합(EU)ㆍ미국ㆍ아세안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어 훌륭한 제조기지로서의 이점을 갖춘 나라입니다. 이에 맞춰 한국지멘스는 국내에서 투자를 확대하고 인수합병(M&A)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김종갑 한국지멘스 회장은 서울 충정로 본사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두 가지 투자 매력이 있다"며 "강한 제조업 경쟁력이 첫번째 매력이고 광활한 소비시장인 미국ㆍEU 등과 맺고 있는 FTA가 또 하나의 긍정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은 미국 전체 엔지니어 수와 맞먹는 6만명이 넘는 엔지니어가 있는데 이 같은 환경은 전세계 어디에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며 "중국ㆍ말레이시아보다 임금은 비쌀지 몰라도 기술 수준은 분명 높다"고 덧붙였다. 실제 초음파 의료기기의 경우 지멘스의 전세계 공급량 60%를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한국지멘스는 앞으로도 생산 비중을 더욱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김 회장은 "중국은 임금 인상 등으로 투자환경이 과거에 비해 다소 악화됐다"며 "(글로벌 기업들이)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는 중국에 계속 투자하겠지만 중국을 제조기지로 삼기 위한 움직임은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지멘스의 모든 사업부문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김 회장은 최근 국내에서의 지멘스 브랜드 인지도 향상에 힘을 쏟고 있다. "지멘스가 6ㆍ25전쟁이 끝난 직후인 지난 1953년 한국에 진출했으니 이제 한국지멘스가 설립된 지도 60년이 흘렀는데요. 아직도 지멘스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은 제품만 잘 만들면 고객들이 저절로 지멘스를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고 회사 홍보를 소홀해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회사 건물에 'SIEMENS'라는 간판을 붙인 것도 최근의 일이니까요. 하지만 앞으로는 브랜딩에 적극적으로 나설 방침입니다. 국민들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브랜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 한국지멘스의 '한국 기업화'에도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내에서 더 많은 부가가치와 고용을 창출하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지멘스는 분명 한국 기업이며 다른 국내 기업과 다를 바가 없다"며 "최고경영자(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한국의 투자환경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얼마나 유리한지를 본사에 잘 설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회장은 "나는 한국인 CEO로서 한국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한국지멘스의 '한국화'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국내 기업들과의 동반성장도 한국지멘스의 주요 화두다. 파트너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하도급 등 법률적으로 전혀 위반이 없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지멘스의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해 장기적으로 협력사와 상생하는 길로 간다는 게 한국지멘스의 모토다. 김 회장은 "지멘스의 특징이 파트너로 한 업체를 정하면 가능한 오래 같이 가고자 하는 것"이라며 "사업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관계로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준법 윤리경영도 우리 수준으로 맞춰달라고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지멘스가 사업부문에서 최근 주력하고 있는 부분은 에너지, 산업, 헬스케어, 도시ㆍ인프라 등이다. 이는 4대 메가 트렌드인 인구변화(인구 증가 및 고령화), 기후변화, 도시화, 세계화의 진전에 대응하기 위한 것. "에너지 부문은 원자력발전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고 고효율 화력발전과 해상풍력사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산업 부문은 공장 자동화, 수처리 2차전지사업에 주력하고 헬스케어는 영상의료장비 개발, 진단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도시ㆍ인프라 부문에서는 초고속 열차, 빌딩 자동화 스마트그리드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에너지사업 비중이 가장 큽니다만 4개 부문 모두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멘스는 중기적으로 1,000억유로로 매출을 늘리고 한국지멘스는 매출과 수주를 5년 내에 현재의 두 배로 확대할 방침이다. 김 회장은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연구개발 강화, 선택과 집중을 꼽았다. "지멘스는 내부적 성장(organic growth)과 M&A를 통한 성장이 대체로 50대50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매출의 5.3%를 연구개발에 쓰고 있습니다. 특허는 독일 특허청 3위, 유럽 특허청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업 때부터의 운영원칙인 지속 가능성의 원칙에 따라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지멘스는 독일 전기전자산업의 역사입니다만 전기전자 부문도 사업 시너지가 적거나 지멘스 포트폴리오로 적절하지 않으면 분사ㆍ매각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김 회장은 대화의 주제가 한국지멘스의 사회공헌활동과 윤리경영으로 옮아가자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지멘스의 방침은 지멘스가 잘하는 분야에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한국지멘스는 편부모 슬하의 어린이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이들이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버스에 의료기기를 장착해 생활환경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위한 이동검진을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지멘스는 지멘스의 예산 지원으로 동북아기업윤리학교를 2년째 운영하고 있다. 한국지멘스는 동북아기업윤리학교를 통해 윤리경영에 관심 있는 8개 기업과 윤리경영 관행을 공유하고 대학생들에게 윤리경영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지멘스는 올해 참여기업을 16개 정도로 늘릴 계획이다. 윤리경영포럼도 한국지멘스가 주관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김 회장은 "지멘스의 윤리경영 확산 프로그램이 한국의 윤리경영 발전에 작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미국은 개인 기부 중심이고 유럽은 복지를 국가 책임으로 이해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한국지멘스는 우리의 역량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분야에서 앞으로도 활동을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지멘스 회장이기 이전에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 사장이었던 그에게 한국지멘스와 하이닉스를 경영하면서 느낀 공통점과 차이점을 물었다. "근면하고 협동정신이 강하며 제조업을 중시하는 점에서 한국과 독일 두 나라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분야에서의 속도 추구와 전통 제조업 분야에서의 완벽성 추구라는 점에서 우선순위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속도와 완벽성은 두 나라 문화의 차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SK하이닉스와 지멘스 두 회사는 한국과 독일의 강점을 가장 잘 활용해 성공을 거두고 있는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독일의 투자를 유치해 두 나라의 강점을 모두 활용한다면 최적의 윈윈관계를 이룰 것으로 봅니다."
김 회장은 외국계 기업의 수장으로서 국내에서 사업을 하는 데 겪는 어려운 점도 털어놓았다. "우리나라가 국산화 정책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데 아직 국문 정서상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정부기관에서도 차별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국적 또는 초국적 기업들은 투자환경이 좋은 곳에 투자합니다. 이미 다국적 기업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의 기술, 다른 경영기법을 받아들여 한국화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차관을 지내기도 한 김 회장은 정부 규제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이 정부 초기에 지식경제부의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면서 크게 반성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에서 일할 때 1,000개 이상의 기업을 방문했기에 나름대로는 기업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부에서 심판을 볼 때와 막상 기업에서 선수로 뛸 때의 상황은 많이 달랐습니다. 기업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개입과 규제를 줄이는 환경 조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원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되므로 공공 부문 축소를 통해 지원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획기적 조치가 있어야 선진국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이닉스 경영 어려웠을 때 헬스로 자신감 키웠죠 임지훈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