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신도들에게 곧 지구가 멸망한다고 계시했다. 신도들은 재산을 모두 팔아 교회에 바친 후 휴거를 기다렸다. 웬걸 지구는 멀쩡했다. 교주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시험해본 것이며 이제 여러분의 독실한 신앙심을 증거로 며칠 후 진짜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세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교주는 당신들의 간절한 믿음이 마침내 지구 전체를 살려냈다고 선포했다.
외부인이 보면 단순한 사기임에도 교주에 대한 신도들의 믿음은 더 강렬해졌다. 왜 그랬을까. 이미 돌아서기에는 너무 늦었고 돌아서본들 세상을 살아갈 물적 기반은 사라졌다. 결국 말씀(?)에 매달리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리화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의 전형적인 예다. 이런 인지부조화가 지금의 경제 상황을 설명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전문가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미 기대 효능을 상실했음에도 그럴수록 과거의 경제이론에 집착하는 양상이다.
재정적자가 천문학적 수준인데도 재정확대로 경기를 부양하라고 외치는가 하면 유동성 함정에 빠졌는데도 양적완화라는 이름 아래 돈을 뿌려대라고 말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재정정책은 총수요가 부족할 때 정부가 빚을 내서 경기를 부양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제가 회복되고 고용이 늘면 자연히 세수가 확대돼 재정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빼고 더해 균형재정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요즘은 이 이론이 먹히지 않는다. 경기가 나빠지면 재정을 동원해 소비를 진작하려 하고 모처럼 경기가 회복돼 재정수입이 늘면 이 여유분을 새로운 복지에 쓰자고 한다. 빚 갚기는 안중에 없다. 재정 이론이 점점 더 힘을 잃게 된다.
그럼 통화정책은? 전 세계 중앙은행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 정책으로 경기 침체에 맞서왔다. 이젠 제로금리까지 내려왔다. 그래도 안 통하자 통화를 무한정 쏟아붓는 흉내까지 낸다. 단기 효력에만 매달려 장기적 후유증에는 눈을 감고 있다.
얼마 전 한 유력 언론이 금리 인하를 강력히 촉구하면서 한국은행을 야유했다. 창문이 열쇠로 잠긴 방에 열 사람이 있는데 점점 더워졌다. 덥다는 사람이 늘어나 아홉 번째 사람까지 "너무 더워 못 살겠다"고 하자 내내 침묵하고 있던 열 번째 사람이 마지못해 열쇠를 꺼내 창문을 열었다.
물론 그 열 번째 사람이 한은 총재라는 것이다. 야유가 아팠던지 며칠 후 한은은 금리 인하를 실시했다. 과연 창문 바깥의 공기는 달랐다. 30도인 방 안 온도와 달리 섭씨 33도였던 것이다. 이들 아홉 명은 당장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리라는 관행적 사고에 젖어 있었을 뿐이다.
일본이나 유로존 경제 모두 이런 구조적 함정에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국제통화기금(IMF)이나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유로존에 경기부양을 위해 더 강력한 양적완화를 실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유로존 각국은 그 어느 때보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밀접히 연결돼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양적완화를 실시한다 해도 그리스와 스페인·이탈리아의 경제 구조개혁이 전제되지 않는 한 유로존 전체로는 깨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ECB와 IMF는 그저 현 상황을 지연시키고 강화할 뿐이다. 유로존은 한마디로 스테로이드를 투여한 일본이다.
미국은 그나마 양적완화가 성공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미국은 상시적 구조조정 메커니즘이 가장 활발한 나라다. 다른 나라들과의 일률적 비유가 불가능하다.
한국 경제도 요즘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이 잘 먹혀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경기부양 명목으로 스테로이드 주사에만 연연해할 것이 아니다. 막힌 혈관을 찾아내 뚫어줄 수 있는 외과의를 찾아야 할 때다.
이신우 논설실장 shinwoo@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