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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원 벌기위해 뛰어다니고 맨 땅에 헤딩하며 사업 키우기도
인터넷 벤처창업이 경영 밑거름
경영상 어려움 닥칠 때마다 '세상을 보는 지혜' 책 읽으며
초심 잃지않고 겸손하려 노력
'공존·공영·공익' 가치 최우선… 한걸음씩 탄탄하게 성장할 것
"지난 25년간 최고경영자(CEO)로서 회사를 경영하면서 단돈 수백만원을 벌기 위해 영업을 했던 적도 있어요. 돈을 번다는 게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했고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죠. 그런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아버지의 경영철학을 잘 계승해 오는 2020년에는 송원그룹을 매출 1조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놓겠습니다."
28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송원그룹 본사에서 만난 김해련(52·사진) 회장은 창업주인 고(故) 김영환 회장이 생전에 항상 강조했던 '공존·공영·공익'의 사회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아 회사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고 김 회장이 지난 3월 숙환으로 별세한 후 6월3일 취임식을 갖고 회장직을 이어받은 김 회장은 "아버지의 아호이기도 한 그룹명 '송원(松源)'은 초지일관 푸르름을 잃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의 정신을 간직하자는 선친의 뜻이 담겨 있다"며 "제가 작은 벤처회사를 운영하면서 간직했던 경영자로서의 마음가짐, 그리고 아버님의 경영철학을 잘 계승하겠다는 지금의 결심을 잃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송원그룹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탄탄하게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암산왕'으로 불렸던 어린 시절=김 회장은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어머니는 임신 8개월 때 자궁파열로 조산을 하고 자궁 절제까지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없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뿐인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야유회 등 회사 행사에는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가족 동반 모임이 아닐 때도 자주 데리고 다니셔서 어른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런 경험들이 더 깊이 생각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 같아요. 그렇듯 자신감을 심어주는 성장 과정 역시 아버지의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김 회장은 어릴 적 살았던 서울 성수동 남영전구 사택 시절을 자주 떠올린다. 관리책임자로 스카우트된 부친을 따라 삼촌들과 어머니의 조카 등 7명이 함께 방 두 칸짜리 사택에 살았지만 김 회장은 공장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았던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미소를 짓는다.
"회사 사무실을 놀이터 삼아 경리 언니와 암산 내기를 했던 기억이 많아요. 언니는 주산으로, 저는 암산으로 누가 빨리 계산하는지 내기를 자주 했는데 제가 이긴 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어릴 적 별명이 '암산왕'이었지요."
◇송원그룹의 탄생, 그리고 장학 사업=가정 형편으로 서울대 상대를 어렵게 졸업한 고 김 회장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74년 한국전열화학을 인수하면서부터. 태경산업의 전신인 한국전열화학은 카바이드 제조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제철소 조업에 필요한 카바이드계 탈황제 제품(제강정련제)은 수입에 의존했던 품목이었다.
한국전열화학은 1976년 국내 최초로 기술개발에 성공해 제강제련제 전문 제조업체로서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이어 1980년 백광소재 설립과 1984년 경인화학산업 인수를 통해 전후방 사업 부문으로 진출, 석회 소재 분야에서 일관생산 체계를 갖췄다. 1983년에는 남영전구를 인수해 생활 소비재 부문에도 진출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시며 늘 가난한 고학생 시절 자신의 결심을 되뇌셨어요. 사업을 하는 이유가 장학사업을 하기 위해서이고 사업은 국가에 이익이 돼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하셨죠. 그래서 창업 3년 차인 1977년 회사가 손익분기점을 넘자마자 가장 먼저 사내 장학금 제도를 만들었어요. 직원들의 자녀는 누구라도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장학금을 줬는데 덕분에 제조업 특유의 높은 이직률도 낮아지고 충성도도 매우 높아졌지요. 그것을 기반으로 1983년 아버지가 꿈꾸던 장학회를 설립하게 됐던 겁니다."
고 김 회장의 기업 이념이자 목표였던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은 2013년 30주년에 이르는 동안 573명에게 64억원의 장학금을 쾌척했다. 현재는 매년 80여명의 학생들이 연간 1,000만원의 장학금을 받고 있다.
◇인터넷 벤처 창업, 그리고 경영자로서의 길=김 회장은 부친이 큰 사업체를 이끌고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사업을 일구고 싶어 창업에 나선다. 아버지의 권유로 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페이스대학 경영학 석사(MBA)를 마친 그녀는 패션 분야에 흥미를 갖고 뉴욕 F.I.T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이어 1989년 29세의 나이에 여성복 브랜드 '아드리안느'를 창업했다.
'아드리안느'는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등에서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고급 패션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 1999년에는 에이다임을 설립, 국내 최초의 인터넷 패션 쇼핑몰인 '패션플러스'를 선보여 연 매출 800억원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인수했던 '인터플래닝'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전문적인 트렌드 컨설팅을 진행하면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사업이 쉽게 진행됐던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패션회사 영업부장을 찾아가 설득해 입점시키는 등 '맨땅에 헤딩'하면서 사업을 키웠어요.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단돈 수백만원짜리 일감을 수주하기 위해 영업을 했었지요. 돌이켜보면 갑보다는 을, 병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송원그룹에 입사했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경영자로서 거쳐야 할 길을 걸어왔던 지난 25년이었다고 생각해요."
송 회장은 하지만 패션 사업의 특성상 부침이 많은데다 인터넷 패션 쇼핑몰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결국 사업을 정리했다. 투자유치와 상장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인터넷 창업을 결심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벤처캐피털로부터 쉽게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아버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창업했던 터라 투자를 하겠다는 벤처캐피털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서 투자를 받았지요. 상장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더군요. 상장을 추진할 때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에 좌절을 겪다가 결국 내가 갖고 있던 지분을 매각해 투자 원금에다 엄청나게 불어난 이자를 갚고 회사를 떠나게 됐던 거죠."
송 회장은 그렇게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 아버지가 늘 강조하셨던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씀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25년 동안 경영자로서 살아올 수 있었으니 그런 경험과 깨달음이 송원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는다"고 미소를 지었다.
◇불신(不信)이 지혜로우며 유용하다=김 회장은 창업했을 때부터 마음이 힘들 때나 경영상 어려움이 닥칠 때면 항상 옆에 두고 들춰보는 책이 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지은 '세상을 보는 지혜'다. 부친이 떠나며 무거운 자리를 맡게 된 후에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에 더욱 눈길이 간다고 한다.
김 회장은 인터뷰 중 책갈피를 접어 줄까지 쳐 둔 구절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책에는 "결코 자만을 보이지 마라. 자신에게 불만족하는 것은 소심한 것이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끝없이 높은 완벽성을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있는 비천하고 평범한 재능에도 아주 만족한다. 불신이 차라리 늘 지혜로우며 더 유용하다"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며 존경과 성공을 함께 일구신 것은 아마도 초지일관,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오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공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의 작은 능력을 과신하면서 함정에 빠지고 결국 망하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저 또한 내 속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능력에 자만하거나 혹여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을까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려고 합니다. 1,000여명의 송원그룹 직원들과 아버지와 인연이 닿은 600여명 장학생분들의 지혜를 모아 송원그룹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가야 할 길이니까요."
매출 1조, 신사업 3,000억, 상장사 5개, 세계최고 제품 7개 목표 ■ 金 회장의 1·3·5·7 비전 정책 세워야 |
■ 김해련 회장은 |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