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는 화려하다, 폼 난다?' 오해고 착각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곱고 화려하게 묘사되는 큐레이터의 실상은 수면부족으로 얼굴은 푸석하고 쥐어짠 머리는 산발이요 중노동에 박봉인 것도 모자라 제 주머니까지 터는 처지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줄기차게 큐레이터를 천직으로 안고 살아가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전시기획에 젊은 시절을 다 바치며 살아가는 서진석(46·사진) 대안공간 루프 대표는 작품을 새롭게 보게 하고 새 판을 그려낸다는 면에서 "전시기획(curating)도 창작"이라고 말한다. 그는 늘 확장적이고 미래적인 '하이브리드 큐레이팅'을 지향하며 타 장르와 결합하고 기업과 손잡는 방법을 통해 미술의 자생방안과 창조경제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큐레이터나 창작자를 넘어 미래학자나 사회·경제학자로도 볼 만하다.
맞다, 틀리다의 흑백논리는 갈등의 탈출구를 찾을 수 없으나 창의적인 사람은 '대안'을 내놓는다. 흰색과 검정색 사이에서 애매한 회색으로 숨어드는 게 아니라 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더 빛 고운 보라를 찾아내듯 말이다. 상업성을 추구하는 화랑(갤러리)과 공공성을 전제한 대중성을 지향하는 미술관, 그리고 돈을 내고 전시하는 대관 화랑만 존재하던 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 서 대표는 '대안공간'을 제안했다. 공적기능인 참신한 작가 발굴을 수행하면서도 상업성은 배제한 비영리 전시공간 '대안공간 루프(LOOP)'를 지난 1999년 2월 개관했다.
"대안공간은 주류에서 빠졌으나 필요한 부분을 보충·보완·대리합니다. 서구에서는 1960~1970년대 프랑스 등 서구의 6·8혁명이나 히피 등 보수적 체제에 변화와 혁신을 꿈꾸는 비주류 문화운동이 일었고 그때 미술계에서 대안적 공간(alternative space)이 생겨나 비주류이던 설치미술·행위예술 등을 받아들였습니다. 국내는 루프가 첫 시도였고 이후 대안공간 풀, 사루비아다방 등이 생겨났고 창작촌으로 시작한 쌈지가 홍대 앞에 대안공간을 열었습니다. 1990년대 말 당시는 미술시장(고미술 제외한 현대미술)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돈 내고 전시장을 빌리는 대관 화랑이 97%였기에 우리가 추구한 대안적 역할은 무료 전시공간과 신진작가 발굴이었죠."
유학파 작가들의 귀국 첫 무대는 주로 대안공간 루프였다. 서 대표의 안목은 탁월했다. 이동기 작가를 비롯해 권오상·김기라·박미나·성낙희·오인환·이환권·임민욱·정연두·함경아·홍영인 등 현재 한국 현대미술계의 중추들이 루프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최근에는 백정기·한경우 등 주목 받는 작가들이 이곳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대안공간 15년이 지난 지금은 그 정체성을 다시 찾는 과도기예요. 요즘은 미술관은 물론 상업화랑도 신진 발굴에 적극적이니 이제 다른 대안적 역할에 주목해야죠. 소유하는 사적(私的) 가치로서가 아닌 예술의 공적기능으로 선동·정치적인 사회정치적 공공성과 물건과 결합해 일상으로 예술이 들어오는 사회환경적 공공성이 있습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나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 등이 그랬는데 이 두 흐름이 오늘날 되풀이되고 있어요. 온라인상에서 예술에 관한 사회정치적 움직임이 활발하다면 오프라인에서는 인본주의적 감성을 결합한 디자인 문화운동이 일어나 예술로 우리 환경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모색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음악·패션·건축이 모두 결합된 전시를 추구합니다. 또한 디지털테크놀로지의 역할과 아시아적 가치의 재발견, 정치·경제와 무관한 수평적 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한 미술적 생산을 그 답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 정부가 출범과 함께 내세운 '창조경제'를 서 대표는 이미 1990년대부터 고민했고 실행해왔다. 신자유주의 이후 서구 미술계의 변화가 근거였다. 미술품의 소유는 오랜 전통이나 1980년대 이후 채권·증권처럼 현대미술이 대체투자 상품화되기 시작했다. 소득 상위 5% 이내에서 미술 소비가 일어나던 것이 중산층으로 확대됐고 아트펀드가 등장하는 등 '금융화'되면서 미술시장도 경기변동에 후행해 연동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투자상품을 연구하듯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대중화'가 함께 이뤄졌다. 동시에 현대미술의 '산업화'가 전개됐다.
"이제 기업은 물건뿐 아니라 문화와 꿈을 팔아야 해요. 애플은 컴퓨터가 아니라 이미지를,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닌 문화를 파는 거예요. 생산성에서 마진을 찾는 기업들은 문화를 파는 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하기에 기업들이 크리에이티브 이미지를 흡수하지 못하면 도태됩니다. 서구에서는 1990년대부터 아트마케팅이 일반화됐고 앱솔루트보드카·BMW·샤넬·IBM 등의 성공사례가 있죠. 기업만이 아니라 도시도 꿈과 이미지를 생산해야 뒤처지지 않습니다. 요코하마는 '크리에이티브 시티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싱가포르·홍콩 등이 유명하지만 우리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에서 고배를 마셨고 2000년 이후 본격 전개된 아트마케팅도 아직 미흡합니다."
비영리를 추구하는 대안공간의 자생방안을 서 대표는 이 지점에서 찾아냈다. 작품을 사고파는 미술시장만이 아니라 기업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미술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소통창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건없는 후원인 '메세나'와는 엄연히 다르다.
"기획 독립권의 보장을 전제로 기업에 무형적 기여를 해줄 수 있습니다. 홍보용 로고 노출은 물론 각종 협업과 편의제공이 가능하죠. 후원에 대해 기업에는 크리에이티브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경제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의 동행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예술가치만 강조하면 기업의 일방적 후원이 지속되기 어렵고 기업이 원하는 커미션 워크(주문형 작업)는 예술적 평가가 어렵거든요.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작가지원을 위해 '미술시장' 발전방안만 파고들면 답이 없습니다. 후원제도 활성화나 일반인 펀드레이징, 멤버십, 티케팅, 기업 컬래버레이션 등 경제가치를 수반한 예술성 추구의 방법을 다각화해야 합니다. 미술이 자생적인 선순환 생태계도 구축함과 동시에 기업과의 상생, 나아가 창조경제의 실현이 가능해 지는 것이죠. "
서 대표는 최근 핸드백 브랜드 시몬느와 협업했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현대자동차의 '드림 소사이어티'전을 준비 중이다.
한편 2004년 비디오아트 페스티벌 '무브 온 아시아'를 기획한 서 대표는 150여명 아시아 작가들과 함께하는 세계 순회전을 매년 열고 있다. 백남준이 개척한 비디오아트에서 한류를 개척한 것. 2006년에는 세계적 미디어아트 전문기관인 독일 ZKM, 영국 Fact 등과 '미디어 아카이브 네트워크 포럼'을 조직해 오늘날 미디어아트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주도하고 있으며 한중일 교류전을 꾸준히 열고 있다.
"아시아가 타의(외세)에 의한 근대화를 겪으며 주체성이 흔들린 미술적 공백기를 갖고 있기에 한중일은 과거 근대미술사의 공백기를 서로 채우고 공유하며 또 다른 아시아적 가치관을 가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아시아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아시아가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들고 서구 독립적 시장을 형성했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죠."
미술을 전시장 밖으로, 세상 속으로 끄집어낸 서 대표는 한국미술을 아시아로, 아시아를 세계로 펼쳐 보이고 있다. 굵직한 해외 미술관 관장이나 큐레이터가 한국을 찾으면 어김없이 그를 만나는 이유다. 다시 보니 그는 우리의 미래를 큐레이팅하고 있었다.
"CEO에 창조경영 영감 줄 작가는 정연두·김기라·장지아" ■추천 작가 물었더니… 김기라 작가에 대해서는 "주변의 사물이나 현상을 자기화(自己化)해 재조립하는 감각과 능력이 국내 최고"라 칭하며 "진정한 의미의 창조는 신(神)뿐이고 우리에게는 이미지와 개념의 재생산이 중요한 만큼 사회와 예술계를 넓게 보고 다양한 사례를 자기에 맞게 재조합할 수 있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적 창조"라고 말했다. 더 이상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돌파구를 모색할 창조경영의 아이디어를 그의 작품에서 얻어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장지아 작가에 대해서는 "성·폭력·식탐 등 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구에 대한 표출에 있어서 관습적 규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결코 자극적이지 않다"며 "성적 이미지가 자칫 쾌락적 추구만 남기는데 그의 작품은 나체·분비물 등을 보여주면서도 야하지도 더럽지도 않다"고 소개했다. 욕구의 분출을 보여주지만 계산적이지 않은 시도이며 이미지에 합당한 개념이 동반되기에 의외로 그 결과물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를 통해 기업은 추구하는 소비코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는 얘기다. |
He is... |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