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때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의 적정수준을 단기외채 총액의 1.3~1.6배 정도라고 주장했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상환기간 1년 미만인 단기외채에 대한 상환 압박이 커지는 만큼 단기외채 총액에다 여유자금을 합친 금액이 적정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그 정도면 '안심'수준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적정'외환보유액을 추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선 장단기 외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 국내 경제환경과 국제금융 시장여건에 따라서 외환보유액의 적정수준은 변할 수 있다. 당시에도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만기 1년 이내 외채뿐 아니라 외국인 증권투자 자금의 30%와 최근 3개월 동안의 수입액에 해당하는 금액까지 외환으로 갖고 있어야 안전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6월 말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3,264억달러다. 단기외채는 1,222억달러, 그리고 총외채는 4,103억달러가량이다. KDI 기준으로 보면 현재 우리의 외환보유액은 충분한 셈이다. 그러나 보다 보수적인 민간연구소들의 기준에 따르면 아직도 외환보유액은 좀 더 확충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외환보유액은 너무 많으면 인플레이션과 자산 버블 위험이 있다. 반면에 부족하면 외화자금 경색 및 디폴트(채무불이행)가 우려된다.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는 외국자금이 얼마나 많이 국내로 들어왔다가 위기에 일시에 빠져나가느냐에 달렸다.
자본통제 아래서는 외환보유액이 비교적 적더라도 어느 정도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의 위험을 줄이는 방안으로 외환거래에 세금을 부과해 투기를 억제하려는 소위 '토빈세'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단기자본 거래에 세금을 매기면 투기적인 핫머니의 이동은 줄어들 것이다. 자본통제 외에도 금융규제ㆍ감독 등 자본이동을 억제하는 조치들은 많다. 정부는 외환시장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이후 은행의 선물환포지션 한도 축소, 외국인의 채권투자 과세, 외환건전성 부담금 부과 등 대책을 마련해왔다. 대외채무 급증을 막기 위해 외화유동성 관리를 더욱 강화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ㆍ유럽연합(EU)ㆍ일본 등 선진국들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양적완화를 실시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돈을 찍어내서 자국통화 가치를 떨어트리고 수출을 확대해서 경기침체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양적완화를 시작하거나 출구전략을 발표할 때, 또 일본이 뒤늦게 양적완화에 뛰어들 때, 글로벌 금융시장은 예외 없이 크게 동요한다.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출구전략을 본격적으로 실시할 경우 원화가치가 폭락하고 유동성위기가 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선진국 양적완화의 피해를 줄이고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외환보유액의 확충은 효과적인 정책수단이 될 수 있다. 선진국의 양적완화에 대응해서 원화의 급격한 절상을 억제할 뿐 아니라 외환보유액 확충은 그 자체가 확장적인 통화정책으로 경기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선진국이 출구전략으로 돌아서면 충분한 외환보유액은 유동성 위기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자본통제와 관련해서 외환보유액이 적정 수준을 넘으면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에 대비하는 통제수단을 새로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브라질이 2009년 이후 자국 채권에 투자하는 외국인에게 6%의 토빈세를 매겨왔으나 최근에 폐지했다. 자본통제가 능사가 아니며 그만큼 외국인 투자가 급감하는 등 폐단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도 독자적으로 자본 쓰나미를 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외환보유액이 넉넉하다면 자본통제나 토빈세를 도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자본이동을 위축시키는 규제나 감독조치가 강화되면 과도한 외환보유액이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를 판정하는 것은 적정수준의 외환을 보유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자본통제나 토빈세 및 각종 금융규제, 감독을 줄이고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것과 외환보유액을 줄이고 각종규제 등으로 대체하는 것을 비용효율 면에서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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