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산업계의 새해 경영화두 가운데 하나는 단연 '공존'이다. 공존하면 으레 대기업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 경제의 바탕을 이루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각자의 위치에서 더불어 살기에 매진한다면 우리 경제 체질은 더욱 튼튼해질 수 있다.
중소기업이지만 '공존'을 철학으로 삼아 성장하는 기업인들이 있다. 민종기 케이티롤 사장도 그 중 한 명이다. 케이티롤은 철강제품을 만들 때 필요한 압연롤을 만드는 회사로 연 매출 230억원 규모의 알짜 중소기업이다. 철판이든 철근이든 철강 제품을 만들 때는 두 개의 롤 사이에 밀어넣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때 쓰는 롤이 바로 압연롤이다.
화성 상공회의소 회장이기도 한 민 사장은 1일 화성 상의 직원들과 함께 양로원 봉사활동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거창한 선언은 없었지만 민 사장은 나름의 방법으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묵묵히 실천한 셈이다.
"가치경영이라는 게 있잖아요. 주주의 이익과 수익의 극대화만 강조돼서는 안 됩니다. 기업은 나라ㆍ이웃과 함께해야 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업입니다."
민 사장의 이 같은 생각은 그의 집무실 곳곳에서도 녹아났다.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이태석 신부의 묘소 앞에서 찍은 민 사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민 사장은 "종교와 상관없이 실천을 통해 나눔의 가치를 증명한 분"이라며 "선친의 묘소를 찾아가다 일부러 시간 내서 들러봤다"며 웃었다.
옆에 놓인 또 다른 사진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눈물을 흘리는 보도사진이었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민 사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결정됐을 때 모습"이라며 "삼성과는 개인적으로 전혀 관계는 없지만 기업가가 공동체의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 깊어서 넣어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 사장이 생각하는 사회기여는 단지 임직원이 양로원을 찾거나 돈을 기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업 활동 자체가 사회발전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제품을 만들어도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들면 산업이 발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식이다. 민 사장은 "좋은 롤을 만들면 철강 산업이 발전한다"며 "이게 케이티 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사명감"이라고 말했다.
협력업체와의 관계도 원칙에 따른다면 공공의 이익이 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민 사장은 이 같은 맥락에서 기업가를 오거리에 서 있는 교통경찰에 비유했다. 그는 "한 기업이 조정할 수 있는 돈의 흐름은 생각보다 크다"며 "케이티롤만 해도 한 달에 수십억원의 자재를 구매하는데 이를 정의로운 기준에 맞춰 흐르게 하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반면 사사로운 기준을 적용한다면 오거리 전체가 혼돈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민 사장은 이에 협력업체에 지나친 단가인하를 요구하는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 사장은 "사실 케이티롤도 한 해 동안 협력업체에서 좋은 원자재를 제때 공급 받았기 때문에 무사히 1년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라며 "대기업도 구매를 얼마나 싸게 하느냐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품질과 납기 등 다각적인 관점에서 기여도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 사장은 그러면서 "케이티롤의 경우 구매 원칙 중 하나가 '절대 무한경쟁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무한경쟁을 하면 시장의 가격 질서가 무너지고 장기적으로 우리 회사에도 손해"라고 말했다.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민 사장이지만 사실 그는 사업을 키우는 데도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6년 주물공장으로 시작해 변신을 거듭하며 한국 경제발전사와 맥을 같이해온 그다. 현재 케이티롤이 만드는 압연롤은 주물로 만드는 제품 가운데 가장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품목으로 꼽힌다. 크게는 무게가 수십 톤에 이르지만 설계는 0.1㎜ 단위의 정밀함이 필요하다. 열처리 등 공정도 여러 단계다. 고급제품을 만드는 지금과 달리 민 사장이 정작 처음 주물업체를 시작할 때 만들었던 품목은 아령이었다. 가장 단순한 주조품이다.
민 사장이 주물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76년. 철재 유통을 하다 부실 채권이 생기면서 채무자의 주물 설비를 떠안게 돼 우연찮게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현대양행(현재 만도)에서 버려지는 폐철을 구해 아령을 만들었다. 원가가 싸다 보니 부가가치가 높았다. 때마침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가 퍼지면서 전국의 각 부대마다 의무적으로 아령이 보급되면서 사업은 승승장구 했다. 민 사장은 그러나 아령사업이 절정을 이룰 무렵 2년 만에 아령 판매를 과감히 접었다. 성장성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제가 사업을 한 모든 시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벌이를 할 때였습니다. 아령으로 2년 동안 당시 1,500평 공장 부지를 살 수 있을 만큼 벌었으니까요"라며 "그래도 아령 같은 단순한 제품으로는 미래를 준비하기에 부족한데다 품목을 넓히고 시장을 넓게 가야 기계공업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민 사장은 이후 기계부품ㆍ자동차부품 등 품목을 점차 고급화했다. 그가 롤을 선택한 것은 27년 전 체계적인 생산관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부터다. 민 사장은 "당시는 전적으로 몇몇 숙련공의 결정에 따라 생산량이나 작업일수ㆍ시간이 정해지던 시기"라며 "기능인력 몇 명에 회사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니 표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가장 체계적인 생산이 필요한 품목이 바로 롤이었다"고 전했다.
막상 시작은 했지만 해외 기업과 국내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던 터라 롤을 개발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일본에 수시로 찾아가서 몇 시간이고 설비를 쳐다보며 기술을 익히고 장비를 국산화하며 사업을 일궈나갔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케이티롤은 우리나라 중소형 압연롤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강소기업이 됐다.
민 사장은 "기업은 나무와 같아서 일년에 조금이라도 자라지 못하면 죽게 마련"이라며 "죽지 않으려면 새로운 품목에 도전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모한 순간도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 고급 소재인 하이스롤을 개발할 당시 임직원들도 모두 개발에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케이티롤이 수년 동안 버린 불량품만 200개, 금액으로는 30억원에 이르는 규모의 시행착오를 겪고 결국 하이스롤을 개발해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민 사장은 "하나를 정하면 성공 여부를 떠나서 끝까지 해봐야 한다. 그렇게 해야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고 배우기 때문"이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민 사장은 이제 시장을 해외로 넓혀나가고 있다. 그는 현재 30% 수준인 수출 비중을 60%까지 높일 계획이다. 최근에는 대형 압연롤 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미 충북 예산에 약 5만㎡ 규모의 부지를 확보해 둔 상태다. 대형롤이 해외 시장에 보다 안전하게 진출할 수 있도록 일본 기업과 합작 형태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민 사장은 "지금 여러 일본 업체와 접촉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민 사장은 "예전에는 롤이라고 하면 히타치를 떠올렸는데 앞으로는 케이티롤이 롤의 대명사로 자리잡는 것이 목표"라며 "롤은 무거워서 유통비도 많이 들고 품질이 까다로운 품목이지만 오히려 이런 철저한 품질관리ㆍ생산관리는 자신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바람도 있다. 케이티롤은 19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또 사회와 공존하는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 사장은 이 같은 케이티 롤의 행보가 기업의 전형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그는 "기업가 정신을 펼치면서도 나눔의 가치를 실천하는 모습이 기업 사회에서 하나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 민종기 사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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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상의 회장으로서 민 사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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