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다. 찰리 채플린이 남긴 이 말은 한대수(65·사진)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를 부른 한국 포크 록의 대부 한대수는 서울과 미국을 오가며 살았지만 어느 한곳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고독과 외로움은 그의 인생에서 어쩌다 가끔 먹는 간식이 아닌 주식(主食)이었다. 유년시절 실종된 핵 물리학자 아버지, 재가한 어머니 때문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고독하게 자랐다."삶의 힘든 고비마다 음악이 찾아왔다"는 그에게 오로지 음악만이 친구였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음악 외 삶의 우선순위는 없을 줄 알았지만 환갑에 얻은 늦둥이 딸 양호는 한대수의 또 다른 존재 이유가 됐다. 지난 12일 발표한 신곡 '뉴크 미 베이비(Nuke me baby)'역시 "딸 양호가 숨쉬는 세상을 위해 늙은이가 무엇을 선물하고 가야 하나" 하는 진지한 고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핵무장과 핵 발전을 반어적으로 풍자한 이 곡의 탄생 스토리가 궁금했다. 이를 핑계 삼아 16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대수와 마주했다. 지난 7년은 꼬박 어린 딸 양호와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돌보는 데 오롯이 시간을 보낸 그였지만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영원한 히피, 진정한 자유가객의 면모는 여전했다. 중간중간 곁들이는 호탕한 웃음, 기자와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오른쪽 손을 번쩍 들어 손뼉 맞장구를 유도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부친은 핵 물리학자, 아들은 반핵(反核)을 외치다=한씨의 부친은 서울대 공대를 거쳐 미국 코넬대에서 유학하다 십수년 가까이 실종됐던 핵물리학자다. 그의 피를 물려받은 한씨는 "핵 에너지는 우리가 아직 제대로 된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몬스터(괴물)"라고 강조하며 반핵(反核)을 음악으로 말한다. 12일 공개된 '뉴크 미 베이비'는 핵무장을 하는 세계에 대한 비판 메시지를 담은 영어 곡이다. 한대수가 작사·작곡·편곡했으며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이 기타 연주를 곁들인 정통 블루스 록이다. 메시지는 무겁지만 리듬은 흥겹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노 뉴크(No Nuke)' 움직임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세대가 무심해요. 반면 미국이나 유럽·대만·일본은 그린피스와 반핵 운동이 막강합니다. 핵에 대한 관념, 얼마나 위험한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이 할아버지가 정치적 설교가 아닌 음악으로 영감을 주고 싶었습니다."
한대수는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당부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원전을 없애고 태양열 등 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아랍권은 바닷물을 담수화하는 노력, 수력 에너지 개발과 같은 청정에너지 사업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요. 안타깝게도 한반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노 뉴크 운동' '그린피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정부도 비로소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 "음악만큼 위대한 건 없어요"=1968년 스무 살의 한대수. 서울 '세시봉'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때다. 팝송 번안곡이 넘쳐나던 당시 자작곡을 선보여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을 알렸다. 헝클어진 장발 머리와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시대를 앞서간 '기인'다운 모습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고 그에게는'영원한 히피'라는 별명이 늘 뒤따랐다.
기타를 들고 자유를 노래했지만 포크 록 대부 한대수의 삶은 물 흐르듯 순탄치만은 않았다. 부산의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세상에 빛을 본 지 백일 만에 핵물리학자인 아버지는 돌연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졸지에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열 살 소년 한대수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 되어서야 그토록 기다리던 아버지를 찾아 조우했지만 만나지 않는 것만 못했다. "부자(父子)간 애틋한 교감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죠. 그러나 절망이었습니다. 한국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야말로 완전 미국 사람이 됐죠. 새어머니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기대는 하나둘 어긋났습니다. 절망의 늪으로 한없이 빠져들었죠."
힘들 때 찾아온 건 음악이었다. "내가 미국에 머물던 1964년부터 1975년 사이가 미국 문화가 한창 꽃필 때였습니다. 비틀스, 밥 딜런, 롤링스톤스 등이 모두 이때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였죠.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이 문화적 환경을 스펀지처럼 모두 흡수했습니다. 일부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난 음악만큼 위대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가늠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무한대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귀로 듣지만 곧 영혼을 찌릅니다. 음악을 듣고, 할 때만큼은 모든 현실의 잡념은 내 것이 아닙니다."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이혼, 끊임없이 홀로 고독·고통·소외감과 맞서 싸워온 굴곡진 삶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의 그에게도 삶은 여전히 녹록해 보이지 않다. 내 한 몸 어찌돼도 상관없으나 이제 그에게는 늘그막에 얻은 보물, 여섯 살 난 딸 양호가 있다. 안정되지 못한 유년을 보낸 그였기에 딸 양호에게 만큼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는 게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양호 아빠가 된 순간 쉰 아홉의 나이가 돼서야 '자본주의'를 뼈저리게 알게 됐습니다(허허). 태어나는 순간부터 화폐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더군요.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정말 내 맘대로 자유롭게 산 삶이었는데 처음에는 죽을 맛이었죠. 하지만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양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딸에게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힘겹지만 웃고 끊임없이 '행복의 나라로'를 외치는 이유입니다."
극한 생존환경, 콘크리트를 뚫고도 꽃을 피우는 생명의 끈기가 그가 지금껏 음악을 하며 한대수로 살아가는 버팀목이다. 이 세상에서 가수 한대수로서 삶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무덤 앞 비석에 뭐라고 한 줄 곁들이고 싶은지 묻고 싶었다.
"Who farted(누가 방귀 꼈어)? 허허. 딸 양호가 내 무덤을 찾아올 때는 아마도 기쁜 날보다 고통스러운 때가 많을 겁니다. 근사한 철학적 메시지보다 힘든 세상 속 한바탕 웃고 가게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He is…
한국디자인포장센터 3급 공무원(디자이너) ▲1974년 1집 앨범'멀고 먼 길' 발표 디자이너 김명신과 결혼 ▲1971∼1973년 해군 복무 ▲1975년 2집 '고무신' 발표 ▲1988년 LA 버뱅크에서 사진관 매니저 활동 ▲1989년 한국 귀국, 3집 '무한대' 발표. ▲1990년 4집 '기억상실' 발표 ▲1991년 5집 '천사들의 담화' 발표 ▲1991년 뉴욕으로 이주 ▲1992년 뉴욕에서 22세 연하 러시아인 옥사나 알페로바와 재혼 ▲2003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 ▲2005년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수상 ▲2007년 딸 양호 출생 |
■ 한대수가 생각하는 K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