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붉은색으로 분단된 산하를 그려온 '붉은산수'의 화가 이세현(44ㆍ사진)이 세계적화랑인 페이스(Pace) 갤러리의 러브콜을 받았다. 페이스갤러리 산하 판화 전문갤러리인 페이스 프린츠(Pace Prints Gallery)는 최근 이세현의 대표작'비트윈 레즈(Between Reds)' 중 120×120cm 사이즈의 작품 3점을 판화로 제작하자고 제안했다. 1968년에 설립된 페이스 프린츠는 앤디워홀ㆍ클라스 올덴버그ㆍ장 뒤뷔페ㆍ키스 해링ㆍ척 클로스ㆍ짐 다인ㆍ요시토모 나라 등 세계적인 거물 작가만을 취급했다. 100명 미만의 작가만을 엄격하게 관리하기에 한국 작가로는 이우환이 유일했고 이세현이 두 번째로 합류한다. 페이스 측은 유망작에 대한 컬렉터나 아트페어에서의 반응을 타진하는 동시에 명작의 대중보급이라는 의도로 판화를 제작한다. 페이스 갤러리의 디렉터가 지난 3월 방한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이세현의 작업실을 찾아온후 지난 5월말 열린 홍콩국제아트페어에서 학고재갤러리 부스에 출품된 이세현 작품의 반응을 보고 전격적으로 판화 제작을 제의했다. 최근 만난 작가는 "개인 뿐아니라 한국미술과 한국 작가를 알리는 기회라 더 기쁘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편을 잡았던 이세현은 2004년 영국 첼시 아트컬리지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가 작업하면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는데 자연에 적응하거나 극복하는 '문화의 차이'란 것은 '자연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다른 것'을 생각하다 보니 내 몸에 체화된 자연의 모습을 찾게 됐죠." 그는 군 복무시절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야간 투시경으로 본 분단의 풍경,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골을 뿌린 경남 통영의 고향 해안선 풍경 등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화폭에 담았다. "적외선 투시경으로 본 모노톤(단색)의 나무와 숲이 황홀하게 아름다웠지만 그곳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비현실적인 풍경이죠. 해안선이 사라지는 고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움을 유지하지 못하는 삶, 사라져가는 풍경에 대한 기억을 담은 작품들입니다." 사실 적외선 투시경으로 보는 풍경은 녹색이지만 이세현은 붉은색을 택했다. 금기와 신성, 몽환,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기억의 심리적 색은 핏빛 붉은색이라는 결론에서다. 대표작이 된 '비트윈 레즈' 시리즈는 유학을 마무리하던 2007년 무렵 탄생했다. 런던 작업실까지 직접 찾아온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 컬렉터 한스 울리히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이후 영국 올비주얼아트,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 중국민생미술관 등의 해외 컬렉션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국내외에서 인기를 쌓고 있지만 작가는 또다른 전환점을 모색 중이다. "지옥에 무지개가 뜬다면 어떨까요? 그 질문에서 시작된 작품들을 구상 중입니다. 내가 좋아해서 그리는 그림이지만 예술로 더 나은 세상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은 그리 큰 욕심이 아닐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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