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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시작된 민주개혁이 역사적으로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중략)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룬 업적은 어떤 상황, 어떤 명분으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1991년 12월25일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의 권좌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연설에서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는 단호한 확신을 보여줬다. 같은 해 공산당내 보수파의 쿠데타는 간신히 넘겼지만, 오히려 급진개혁파의 반격으로 실권하는 그 시점이었다.
고르바초프(82)는 우리가 흔히 '소련'이라 했던, 과거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역대 소련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 혁명 이후 세대며, 54세로 최연소 지도자가 됐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1990년 대통령제 개헌이후 1991년 12월까지 연방 대통령이었다.
1985년 소련 공산당내 서열 1위인 서기장에 올라선 그는 공산주의 통제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ㆍ개방 정책을 시작했다. 세계를 둘로 나누었던 냉전체제를 무너뜨리고 미국 레이건 대통령, 영국 대처 수상을 만나는 등 서방 측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비판과 사유제산 제도, 정교회를 비롯한 종교활동, 서방 대기업과의 경제협력이 허용됐다.
나아가 기존 공산당 기득권 관료들을 몰아내고 보리스 옐친 등 신진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다. 미국ㆍ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으며 서방 국가들과 핵무기 감축협상을 추진했다.
모두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경제침체와 대외적 고립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대외적으로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했고, 이것이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 사상 해방과 궁극적으로 냉전체제 붕괴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그는 1990년 미국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미 그의 회고록이 출판된 바 있지만, 이번 저술은 부제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에서 드러나듯 그의 자서전이다. 그가 어린 시절 병을 앓아 평생 청력에 문제가 있었던 점,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서 간신히 처형을 면한 것과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라이사에 대한 그의 애정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또 청년시절 농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콤바인 수확기를 다루며, 17세에 트랙터 조수로서 노동적기훈장을 받은 그가 후일 협동농장 체제에 대한 개혁에 나서게 된 이유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지적인 면모와 달변, 그리고 낙관론과 지칠 줄 모르는 활력, 정치적인 수완과 당대 실세와의 연줄을 쌓아가는 영리함을 보여준다. 또 브레즈네프 사망 직전부터 결국 그가 연방대통령직에서 사임할 때까지의 권력투쟁 이면사도 생생하게 묘사된다.
특히 그는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특히 폴란드 카틴숲 학살사건과 관련해 "고르바초프가 숨긴 자료를 우연히 발견했다"며 공개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날조라며 분노한다. 실권 이후 전임 대통령에 대해 제공되는 아파트, 별장 등 예우가 모두 몰수되고 언론을 통한 비판 및 된 것에 대해서도 담담히 털어놓는다. 2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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