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기관을 옥죄던 족쇄가 66년 만에 풀렸다. 은행과 증권ㆍ보험 간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해온 글래스-스티걸법을 대신할 금융서비스 현대화법에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 것. 1999년 11월12일의 일이다. 발의한 의원들의 이름을 따 ‘그램-리치-블라일리법(The Gramm-Leach-Bliley Act)으로 불리는 법의 골자는 영역 철폐.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 설립 방식으로 은행과 증권ㆍ보험업에 상호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미국이 영역 간 장벽을 쌓은 이유는 1929년 대공황이 은행의 무리한 확장과 주식투기로 발생했다고 진단했기 때문. 2만5,000개에 이르던 은행이 1만4,100개로 줄어든 1933년 글래스-스티걸법이 마련된 이래 공황의 진짜 원인은 과도한 규제 탓이며 영역 제한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지만 법 개정은 쉽지 않았다. 본격적인 폐지 움직임이 나온 1974년부터 12차례나 상정된 폐지안 역시 금융 독과점에 대한 우려로 번번이 무산됐다. 결국 법의 영역을 허문 것은 시장의 힘. 씨티은행이 타업종 진출 외에는 살 길이 없다며 1998년 실정법을 뛰어넘어 보험그룹인 트래블러스그룹과 합병을 단행하자 영역 철폐가 현안으로 부각돼 끝내 새로운 법이 생겨났다. 금융개혁법은 거인들을 만들었다. 케미컬과 체이스맨해튼ㆍ뱅크원ㆍJP모건 등 하나만으로도 대형인 은행과 투자은행이 JP모건체이스의 깃발 아래 합병된 것을 비롯, 대형화의 바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감독권한이 집중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힘도 더욱 강해졌다. 한국에서도 개혁이 한창이다. 자본시장통합법 통과에 이어 대선 분위기를 타고 미국과 영국에서도 미완의 과제인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간 영역까지 없애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변혁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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