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주(사진) 기업은행장은 올해 그 어떤 인사보다 바쁜 일정을 보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은행장'이라는 레테르가 갖는 상징성이 그만큼 컸다. '금융권 여풍' '여성 상위시대' 등 '여성'에서 파생된 일련의 화두들은 이제는 식상하다 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권 행장이 취임한 후 3개월 만에 벌어졌다. 그렇기 때문일까. 권 행장은 9일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은행산업의 역할론과 미래전망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권 행장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프리즘을 벗어나 은행장으로서 자기 색깔을 내고 싶다는 의지의 반증으로 읽힌다. 그는 현재 국내 은행산업이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고 진단했다. 권 행장은 "장기과제인 저금리·저수익 흐름에다 비대면 채널의 급속한 성장, 여기에 국민적 관심사안이 된 보안 이슈까지 은행산업은 굉장히 어려운 국면을 거치고 있다"며 "앞으로 은행의 경영전략은 이런 어려운 환경을 전제로 펼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권 행장은 그러면서도 '기업은행만의 색깔'은 어떻게든 지켜나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권 행장은 "어린이부터 노령층까지, 창업기업에서 해외 진출을 추진하는 중견기업까지 숨은 수요를 찾아내 평생고객으로 삼을 것"이라고 밝혀 고객 저변 확대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그는 특히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했음에도 돈을 구하지 못해 시장에서 사라지는 기업들을 최소화할 것"이라며 '기술금융'에 대한 집중 지원 방침을 드러내 현 정부의 국정화두 가운데 하나인 '창조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뜻을 밝혔다. 은행산업은 기본적으로 국가기반산업인데다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 이런 점을 인식하듯 권 행장은 은행산업의 역할론과 관련해 이른바 '비자금적 수요'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은행산업이 예금과 대출을 기초로 한 숫자놀음에 치중돼 있었다면 앞으로는 경영 컨설턴트, 가업 승계 프로그램 등과 같은 자금 외적인 부문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업은행은 최근 수년간 중소기업에 대한 컨설턴트 지원을 해주고 있는데 대기순번이 밀려 있을 만큼 고객의 호응이 굉장합니다. 국가경제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과거 자금만 융통해주는 단계에서 벗어나 이러한 비자금적 수요까지 충족시킬 수 있도록 은행산업의 역할이 진화해야 합니다."
기업은행은 지난 2년간 총 1,362개 기업에 경영전략·인사관리·지적재산권 등에 대한 무료 컨설팅을 제공했다. 기업은행이 선구적으로 나서고 있는 문화 콘텐츠 금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은행은 국내 은행 중 유일하게 문화콘텐츠사업부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대출·투자·컨설팅 등 종합지원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오페라나 게임,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문화콘텐츠산업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는데 든든한 자금력과 뛰어난 인재 풀을 갖고 있는 은행이 이들에 대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전 한창 투자은행(IB) 설립 논의가 벌어졌다. 정부가 나서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외쳤고 시장에서는 메가뱅크의 실효성을 두고 활발한 논의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글로벌 IB가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논의 역시 사그라졌지만 IB 업무는 앞으로 국내 은행의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고 권 행장은 지적했다. 다만 과거 IB 논의가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집중됐다면 은행산업과 관련한 IB는 저수익 탈피라는 근본적 고민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산업이 저금리·저수익이란 늪에 빠지면서 투자영역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됐습니다. 벤처 붐을 겪으면서 관련 노하우를 쌓은 은행들은 앞으로 커머셜뿐 아니라 IB 업무에서도 어떤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죠."
권 행장이 기술금융에 특히 관심을 쏟는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기술력 평가를 통해 안정적인 자금지원이 이뤄진다면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했음에도 돈을 구하지 못해 시장에서 사라지는 기업들을 최소화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부가가치 창출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논리다. "지금은 흔한 사례가 됐지만 기업은행이 먼저 기계설비를 담보로 자금을 융통해주자 중소기업들의 경영환경이 크게 개선됐던 교훈이 있습니다. 보다 다양한 형태의 자금지원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권 행장은 이 대목에서 과거 지점 근무 시절 얘기를 들려주며 웃음을 지었다. "지점에서 근무할 때 관리했던 고객 중 건설업종에서 나름의 기술력을 갖춘 곳이 있었는데 다른 은행에서 자금융통이 되지 않아 기업은행으로 찾아왔고 기술력만 믿고 자금이 나갔습니다. 결국 위기를 넘기게 됐어요." 지난해 7월 기술평가 전담조직을 신설한 기업은행은 하반기에만 기술력이 우수한 11개 기업을 대상으로 총 558억원(대출 502억원·투자 56억원)을 지원했다. 이달 말에는 'IBK기술평가시스템'을 오픈해 전 지점에서 기술평가를 신청하고 결과를 조회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한다. 권 행장은 다만 기술금융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유관기관과의 협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학습효과를 쌓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전문인력을 확보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기술력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선 뛰어난 인력을 확보해야 하는데 단기간에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기술보증기금이나 산업은행 등 유관기관들과의 협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술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뤄진다면 기술력이 있으면서도 마케팅 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기업들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 은행산업을 두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표현이 곧잘 쓰인다.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데 그만큼 국내 은행들이 예금과 대출이라는 재래식 성장 공식에 아직 매몰돼 있고 각 은행 간에도 이렇다 할 차별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금리·저성장 기조는 은행산업의 변화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의 영역임을 시사한다.
"은행산업은 국가경제의 새로운 동력으로서 역할을 해야만 하는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은행산업 내 경쟁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고객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에요. 평상시 고객과의 접점을 확대해 고객을 이해하고 있다면 재무제표 없이도 자금을 지원할 수 있고 우리의 고객으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권 행장은 특히 오는 2016년 도입이 확정된 계좌이동제가 은행산업의 생태계 자체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좌이동제는 고객이 은행의 주거래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옮기면 기존 계좌에 연결된 공과금이체·급여이체 등도 별도 신청 없이 자동 이전되는 시스템으로 통신업계의 휴대폰 번호이동제와 유사하다. 이렇게 되면 고객은 계좌 이동에 따른 금전적·시간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시중은행과 지방은행 간 경계가 사라져 말 그대로의 무한경쟁이 펼쳐지게 된다. "계좌이동제는 새로운 정책을 넘어 은행 간 경쟁을 격화시키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봅니다. 은행들은 고객가치 제고를 기초로 한 상품, 지점 정책 등으로 이를 커버하려 들 것입니다." 이를 위해 권 행장이 취임 직후 들고 나온 개념이 '평생고객'이다. "은행 접근성이 좋아지면 고객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수시로 자신에게 최적화된 은행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고객에게 가치를 주는 것은 상품이 될 수도 있고 친절함이 될 수도 있는데 어쨌든 간에 고객을 붙잡기 위한 은행 간 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어요. 유치원 어린이부터 시작해 황혼을 맞는 노령층까지, 그리고 창업기업에서 해외 진출을 추진하는 중견기업까지 고객 한분의 숨어 있는 수요까지 찾아내자는 것이 평생고객화의 개념입니다. 이를 위해 고객과의 접점을 확대해나가겠습니다."
권 행장은 미래 은행산업에서는 중소기업금융 비중이 보다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대기업들은 은행이 아니더라도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 등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또 개인은 가계부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해 개인금융의 총량은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은행산업이 관심을 가질 곳은 중소기업금융밖에 없다는 논리다. "기술평가시스템 도입이나 동반성장협력펀드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중기금융지원에 적극 나서겠습니다."
기업은행은 올해 중기자금 목표치로 지난해보다 2조원 많은 40조원을 제시했다. 권 행장은 "1·4분기까지 흐름만 놓고 보면 실제 연간 중기금융지원금은 목표치를 웃돌 것"이라며 "연체율 등 건전성에도 아직까진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권 행장은 다만 중소기업 간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며 정책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장을 다니다 보면 중소기업들 간 양극화가 심하다는 것이 관찰되는데 그중 영세한 업체일수록 경영환경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들은 주로 내수시장에 관련된 업체들로 경기가 반등하지 않는 이상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워 은행들의 자금지원이 보다 절실합니다."
She is …
△1956년 전북 전주 △경기여고,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1978년 중소기업은행 입행 △1998년 방이역지점장 △2001년 역삼중앙지점장 △2003년 서초남지점장 △2005년 CS센터장 △2007년 PB사업단 부사업단장 008외환사업부장 △2010년 서울중부지역본부장 △2011년 카드사업본부 부행장 △2012년 리스크관리본부 부행장 △2013년 24대 기업은행장
■권 행장은
방송기자 꿈꾸던 여대생 첫 여성행장으로
25년 영업현장 경험에 '디테일 경영' 접목
기자가 되기를 바랐던 여대생이 은행원이 됐다. 입행 동기 중 여성은 손에 꼽히는 정도였는데 35년이 흐른 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은행장이 됐다. 권선주 기업은행장 이야기다.
권 행장은 대학(연세대 영문학과) 시절 교내 방송국에서 동아리활동을 했다. 방송기자의 꿈을 키웠지만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길을 바꿨다. 언니 역시 은행원이었다. 은행과의 인연은 질겼다. 은행 선배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학교 선배(연세대 법학과)였는데 그는 효성그룹에서 임원까지 거친 후 지금은 중소기업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은행 내 생활은 평탄했다. 정적이고 세심한 성격은 은행 업무에 딱 맞았고 은행 내에서는 늘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은행 최초로 여성 1급 승진을 했고 본부장 직함도 가장 먼저 달았다.
우리 사회에 아직 가부장적 잔재가 남아 있는 탓일까. 우리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여성들 중에는 남성성을 차용한 이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권 행장은 남달랐다. 그를 만나본 이들은 권 행장의 장점으로 섬세함과 온화함 같은 여성성을 꼽는다.
실제로 권 행장은 꼼꼼한 일처리로 정평이 나 있다. 행장 내정 직후 그를 만났는데 권 행장은 "진정한 디테일은 사고의 촘촘함을 바탕으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며 "디테일에 강한 행장으로 기억에 남고 싶다"고 말할 정도다. 권 행장이 은행의 안살림을 챙기는 수석부행장(전무)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은행 내에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사업, 계열사의 세심한 부분까지 챙길 수 있는 것도 그의 섬세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행장이 되고 나서도 조찬모임이 없으면 가족들 식사를 챙길 정도다.
권 행장은 은행원이라면 은행 업무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한 직장에서 35년 넘게 근무를 했음에도 그의 주변에는 측근이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권 행장의 무색무취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말로도 이어진다. 국내 은행들이 사내·외적으로 정치적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행장이 되기 직전, 주로 본점에서 근무했던 탓에 그를 관리자의 표본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권 행장은 영업현장에서 25년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본인 스스로도 은행장으로 발탁된 사유가 무엇인 것 같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풍부한 현장 경험'을 꼽는다.
권 행장은 "지점 생활을 오래 한다는 것은 다양한 업무를 다 해볼 수 있다는 말과 같다"면서 "현장 경험이 풍부했던 게 행장이 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현장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하루는 현장에서 시작해 현장으로 끝나는 일이 많다. 인터뷰가 있기 하루 전날 권 행장은 눈을 뜨자마자 한 지역본부를 방문해 50여명의 고객들과 조찬간담회를 가졌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지점을 찾았다.
모두 일곱 곳을 방문해 행원으로부터 '어떤 상품이 필요하다' '인력운용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등의 의견을 전달받았다. 지칠 법도 하지만 발걸음을 재촉해 기업은행과 거래하는 기업체를 방문했다. 기업체의 대표는 타 은행이 제공하지 않는 기업은행만의 '가업 승계 컨설팅'에 고마움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처럼 하루를 현장으로 가득 채운 뒤에야 비로소 본점으로 출근해 보고를 받고 결재 업무를 처리했다. 그는 "취임한 지 석 달이 지났는데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면서 "시간을 밀도 있게 쓰다 보니 하루하루가 의미 있는 날이었다"고 소회했다.
대담=이병관 금융부차장 yhlee@sed.co.kr
사진=이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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