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읽던 책을 오랜만에 꺼냈다가 그 책갈피 사이에서 지난 봄 넣어둔, 그리하여 생생하게 당시를 고스란히 간직한 나뭇잎 하나를 발견했다. 작품이 풍기는 인상은 대안공간 개인전 이후 11년 만에 개인전을 연 작가 이정란을 만난 기분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진짜 작업배경은 좀 다르다. 그녀는 식물학자 겸 사진작가인 칼 블로스펠트의 사집집을 우연히 손에 넣었다. 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그림이나 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객관성에서 비롯한 차분함과 평정심이 존재했다. 이정란은 연필로 그 사진을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극도로 섬세한 표면이 ‘뾰족한 연필심 끝에 제 살이 베어나갈 정도’인 압축발포 PVC 위에. 정교하게 그은 무수한 선들과 치밀한 묘사의 과정 속에서 작가는 집중을 요구받았다. 연필이 내는 사각거림과 찍찍거리는 소리만 존재하는 그 몰입의 시간은 일종의 수행이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정거장, 버티고개’라는 제목을 붙였다. 버티고개의 지명이 갖는 의미보다 ‘버티다’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다. 버틴다는 것은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며 그 안에는 그럼에도 버티게 하는 어떤 기대 같은 것이 숨어있다. 이 그림의 다른 이름은 ‘생각지도 못한 희망’이다. 전시는 23~28일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 (02)734-1333
/조상인기자 ccs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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