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유감이군, 너무 늦었어” 유언
베토벤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유감이군. 늦었어. 너무 늦었어.”라고 한다.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인 1827년 3월 24일 마인츠(Mainz)에서 포도주가 도착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병상에 있던 그가 한 말이라고 한다.
마인츠는 비스바덴(Wiesbaden) 맞은편인 라인(Rhine)강 좌안, 마인(Main)강 입구에 위치한 항구도시인데, 과거 포도주 교역의 중심지로 지금도 포도주축제와 사순절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재미있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40대 중반에 애인에게 버림받고 도박에서 가진 돈까지 몽땅 잃었던 곳이 비스바덴이다.
독일하면 대개 맥주를 먼저 떠올리지만, 독일이 샤르도네(Chardonnay)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품질 좋은 리즐링(Riesling)과 비달(Vidal)을 생산하는 화이트 와인의 명산지인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 사실, 독일은 서늘한 날씨와 부족한 일조량 때문에 포도밭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최고급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가 된 것은 우연을 가장하여 신이 독일인에게 내려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에피소드에서 비롯한다.
#위대한 실수가 빚어낸 ‘슈페트레제’
때는 18세기 말, 라인가우(Rheingau) 지역 한 수도원에서 매년 그래왔듯이 포도를 수확해도 좋은지 물어보려고 그해 농사지은 포도를 따서 멀리 떨어져있는 대주교에게 보냈다. 그런데 1주일이면 돌아오던 전령이 3주가 지나서야 돌아왔고, 그 바람에 수확기를 놓쳐버린 포도가 너무 익게 되었다. 버리기는 아깝고 할 수 없이 와인을 담갔는데, 이듬해 열어보니 지금까지와 다른 달콤하고 색다른 맛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어떻게 담근 것인지를 물어보자, 전령은 엉겁결에 “슈페트레제(Spatlese)“라고 답했다. 이는 “너무 늦게 수확했어요.” 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실수가 빚어낸 ‘슈페트레제’가 탄생하고 독일 와인의 대명사가 된다. 이후 조금이라도 수확기를 더 늦추어 가며 만든 아우스레제(Auslese)가 나오고, 상하기 직전까지 두었다가 잘 익은 포도 알만을 따서 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를, 쪼글쪼글 건포도처럼 말려서 트로켄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을 내놓는다. 급기야 아이스바인(Eiswein: Ice Wine)까지 나오는데, 이는 얼어붙은 포도 알을 수확해서 만든 것이다. 아이스와인은 달콤하고 맑게 떨어지는 맛이 디저트(Dessert)류와 천상의 궁합을 이룬다. 그래서인지 요즘과 같은 송년 파티가 있는 때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기가 높다.
#‘천년의 향기’를 간직한 우리 술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술 중에 서양의 아이스와인을 대체할만한 술이 있다. 옅은 과일향기와 함께, 우아한 황금빛 색을 띠고, 맑고 깨끗하게 이슬처럼 입 안으로 떨어지는 풍미와 혀를 감는 듯 감미로운 단맛이 최고급 슈페트레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술이다. 당연히 아무런 첨가물 없이 쌀, 누룩, 물 이 세 가지만을 가지고 만든다. 논에서 수확, 도정 후 세상에 나오기까지 무려 일 년이 넘는 기간을 거친다. 백일 동안 다섯 번 빚어, 아홉 달을 숙성시키는데, 모든 도가에서 이런 품질의 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서양식 디저트와도 궁합이 잘 맞아 놀랍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다. 웅혼하고 아름다워 듣다보면 먼 우주 공간 어딘가에 머무는 듯하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있고, 그 자리에 달콤한 황금빛 ‘좋은 술’이 있다면, 투명한 유리잔 너머로 보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이든 그 순간만큼은 연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소설 「죄와 벌」에서 사상적 혼란으로 갈등하고 살인까지 했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인 소냐의 발에 키스하며 “당신에게 키스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뇌에 키스를 했다”고 말한다. 소냐의 숭고한 희생으로 사랑과 형제애에 굴복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사상적 평화를 얻는다.
악성 베토벤이,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병들고, 궁핍하고 불행한 생활 속에서도 깊고 풍부한 사랑의 메시지를 써냈던 힘은 세월을 견디며 쌓아온 연륜이 아니었을까. 슈패트레제가, 아이스바인이, 또 ‘천년의 향기’를 간직 한 우리 술이 탄생한 데는 너무 늦었다고 체념하지 않고 하던 일을 그대로 했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다”고 낙심할 사람은 병상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밖에는 없다. 실수하고 실패하지 않고는 위대함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새해에는 우리 국민 모두, 너무 늦었다고 도전조차 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겠다. /이화선 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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