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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 개인전,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려야만 하는가'… 색연필로 담아낸 치열한 자기 고백

■ '정거장, 버티고개'

이정란_정거장버티고개
이정란 '정거장,버티고개'


"몹시 뜨거운 여름날, 작업실에 가기 위해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에 서 있었다. 햇살과 열기로 잠시 아득해졌다. 낙타가 저 멀리서 날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낙타도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이정란은 낙타가 뿌연 신기루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신작 '정거장, 버티고개'를 이같이 설명한다. 힘든 시기를 버티던 작가에게 의지할 곳은 예술 뿐이었다. 그에게 작업실로 향하는 '버티고개'는 지명과 무관하게 '버티다'의 의미가 더 강했다. 버틴다는 것은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뎌낼 것이라는 의지를 품고 있다. 낙타는 아마도 작가 자신이었으리라.

이정란의 개인전이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개막해 28일까지 열린다. 2004년 대안공간 풀에서 변기들로 가득 채운 파격 전시 이후 11년 만의 개인전이다.

신작은 보통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지 않는 재료인 '압축발포 PVC'에 색연필로 제작됐다. 미세한 직조가 요철을 갖는 종이나 캔버스와 달리 압축발포 PVC는 매끈한 표면이 서 있기조차 위태로운 얼음판 같다.



그래서 연필이 닿으면 "제 살을 베어" 그림을 머금는다. 언제 상황이 급변할 지 모르는 살얼음판, 제 살을 파먹으며 버티는 시간이었음을 그가 선택한 소재가 은유한다.

작가는 이 위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거나 식물도감의 사진을 정교하게 베껴 그렸다. 나중에는 그림이 작가를 붙들어 앉혔다. 무엇을 그렸는지보다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작품이다.

관람객에게 '나는 언제, 무엇을 위해 이토록 절박하게 몰두하고 매달린 적 있는가' 자문하게 한다.

/조상인기자 ccs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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