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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4월15일] <1370> 거문도 사건

1885년 4월15일, 영국 군함 세 척이 거문도에 들이닥쳤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얼마 안 지나 막사와 병원이 들어서고 방파제까지 생겼다. 군사행동에 앞서 영국은 청나라의 의중부터 살폈다. 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고 판단한 영국은 점령 3일 후 일본에 사실을 알렸다. 조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조선이 소식을 접한 것은 점령 한달 보름 뒤. 청의 군함을 얻어 타고 조선 조사관이 도착했을 때 거문도의 영국 함정은 여덟 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섬 꼭대기에는 유니언잭이 휘날리고 상하이와 전신을 위한 해저 케이블과 방어용 수뢰까지 깔렸다. 조선의 항의에 영국의 현지 지휘관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알고 싶으면 상부에 문의하라’고 답했다. 영국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러시아 견제였다. 러시아가 인도 공략의 전단계로 아프가니스탄의 전략요충지 판데를 점령(1885년 3월)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포트 해밀턴’이라고 부르던 거문도를 점령해버렸다. 거문도 사건은 19세기 말 영국이 치밀하게 기획한 세계전략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영국은 러시아와의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청과 일본의 항의가 드세지자 23개월여 만에 철수, 거문도 사건도 종료됐지만 세계사에 적지않은 파장을 미쳤다. 러시아는 극동 진출이 해군보다 육군에 달렸다는 교훈을 얻고 검토 단계였던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계획을 굳혔다. 조선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중립국화 논쟁 속에서도 청의 간섭이 심해지고 열강은 조선의 이권을 물어뜯었다. 영국군이 철수할 때 거문도의 민초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굶주림 없는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점령군이 버리는 쇠꼬리와 뼈ㆍ내장에 녹아버린 정체성. 그 결말은 망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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