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지만 전쟁이 보다 오래 지속됐을지도 모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수세로 돌아선 분기점이 소련전선이었으니까. 참모들의 반대에도 히틀러는 왜 인구와 공업생산력을 자랑하던 소련과 전쟁을 벌였을까.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대한 광신 때문이다. 생활권(Living Space)을 뜻한 레벤스라움은 1901년 독일의 지리학자 레첼이 만들어낸 단어. '독일 민족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생활권역을 확대해나가야 한다'며 선보인 신조어다. '미주 대륙은 신이 백인에게 내려준 선물'이라며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멕시코를 침략한 논리였던 '명백한 운명'론(1854년)에 영향 받았다는 레첼의 레벤스라움은 독일민족 정체성 확립과 식민지 확보를 강조한 초기와 달리 시간이 흐르며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진화해나갔다. 히틀러는 감옥에서 저술한 '나의 투쟁'에서 동쪽 땅을 구체적인 생활권으로 제시했다. '혈통이 깨끗하고 우수한 독일인은 중부유럽에서 우랄산맥까지 지배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책에 머물지 않고 국가시책으로 정해진 것은 1935년 11월5일. 베를린에서 군 수뇌부 6명과 비밀회합을 가진 히틀러는 4시간 동안 레벤스라움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실행방안의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2차대전과 제3제국의 몰락. 일본이 부르짖은 '대동아공영권'도 레벤스라움과 용어만 다를 뿐 내용은 비슷하다. 레벤스라움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의 한국침탈 과정을 지켜본 주 도쿄 독일무관 출신의 정치학자 하우스호퍼가 '우등민족의 열등민족 지배 당위론'을 내세우고 히틀러가 이를 본받았다는 학설도 있다. 한국인은 과연 열등민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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