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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8월1일] 코시모 메디치


325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영화를 누렸던 기간이다. 교황청 주거래은행으로 지정된 1412년부터 마지막 후손 지안 가스토네 토스카나 대공이 1737년 사망하기까지 메디치 가문은 교황 3명과 프랑스 왕비 2명을 배출해냈다. 메디치 가문의 명성이 수백년 간 이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는 자선과 기부다. 은행업에서 번 돈을 종교행사나 건축ㆍ조각 등에 아낌없이 퍼부었다. ‘고리대금업자’라는 비난을 희석시키자는 차원이었지만 자선은 가문의 명망을 드높였다. 두번째 이유는 정치권력화. 시민들의 지지와 축적된 자본을 기반으로 피렌체의 권력을 잡았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을 굳힌 주역은 코시모 메디치(Cosimo Medici). 창업자 조바니의 장남으로 1389년 태어난 그는 수도원 학교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ㆍ라틴어를 배웠다. 학업을 마친 뒤 로마지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의 운영방식을 익혀 훗날 피렌체를 지배하는 데 써먹었다. 1464년 8월1일 75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국부(國父) 칭호를 얻었던 그는 역사에서도 기억되는 인물이다. 르네상스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흥망사’를 쓴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코시모라는 이름은 르네상스의 동의어나 다름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코시모가 르네상스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얻은 실제 원인은 조바심.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해야만 고리대금업을 한 죄를 씻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어 건축과 조각ㆍ미술품에 투자했고 다른 부자들의 모방이 잇따르면서 르네상스의 꽃은 활짝 피었다. 코시모는 ‘재산의 사회환원’에서도 원조격이다. 카네기와 록펠러, 워런 버핏까지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문화의 밑바탕에는 ‘하나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다 되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 코시모의 신조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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