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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산책] 명화 순례와 예술혼

장래희망을 묻는 자기 소개란에 무심코 ‘화가’라고 또박또박 적어내던 내성적인 단발머리 소녀는 어느덧 중년의 화가가 됐다. 지금도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사다 주신 명화집을 행여 놓칠세라 가슴에 품고 다녔던 추억을 떠올리며 주말이면 화랑과 미술관들이 밀집한 삼청동 길을 따라 걷는다. 이곳에서 종종 마주치는 신선한 시각의 작품들을 보게 되면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듯 흥분하게 된다. 하지만 간혹 정체성이 상실돼 외국 어디서라도 본 듯한 무책임한 작품이나 전시회와 마주치게 될 때는 참으로 당혹스럽다. 특히 국내에서 열린 루이스 부르주아전은 슬픈 개인 가족사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든 전시회였다. 이처럼 작품들의 본질을 무시한 채 전시자의 취향에 맞게 선별된 국내전을 보면 작가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뉴욕의 전시가 그리워진다. 이 때문인지 필자의 전시장 순회는 작업의 연륜 만큼이나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다. 필자는 전시란 사적이고 주관적으로 표현한 미술 작품을 공적인 전시 공간 안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화가의 입장에서 작품을 출품한다는 것은 개인전이나 단체전이든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우선 중국 상하이 아트페어에서 경험한 동시대 중국 현대 화가들의 사회 성장통을 다룬 냉소적인 그림들이나 중국 심천시의 관산월 미술관에서 보았던 수묵 계열의 작품 등을 통해 필자는 이들의 다양한 감각과 감성표현에 동감했다. 또 노장들의 깊은 내공을 느낄 수 있는 화폭에 경이를 표하기도 했다. 몇 해 전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전시된 물ㆍ불ㆍ흙 등 원초적 자연물과 인간을 주제로 다룬 빌 비올라의 흑백영상물은 동양사상과 종교관을 반영한 묵화를 연상시켰다. 작품의 주제를 담는 형식인 재료, 기법의 순수성을 지켜왔던 나로서는 선(禪) 사상을 비디오 아트라는 기법으로 표현한 수묵적인 영상물 앞에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어느 작가는 전통성에 큰 비중을 두고 다른 이는 현대성에 더 비중을 둔다. 필자에게 작품이란 전통이란 날실과 현대라는 씨실이 교차하는 직물과 유사하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헨리 마티스전은 수 년 동안의 치밀한 기획과 연구로 그 자존심 센 유럽 미술계 인사들을 뉴욕까지 날아오게끔 했다.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전시를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거대한 작품 못지않게 감동을 받게 된 부분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온 예술가들의 혼이다. 초창기의 습작과 모티브를 찾는 여정, 작업의 돌파구가 된 전환기, 비로소 말년에 꽃피운 예술은 감동적 화면에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영화 한 편이나 책 한 권의 향기보다 진하고 그윽하다.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를 보러갈 때마다 먼저 발길을 멈추었던 클로드 모네의 형상 속에 형상이 담긴 거대한 수련의 그림은 내가 고민하던 부분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지칠 때마다 필자가 찾는 정신적 안식처이자 휴식처가 됐다. 모네는 많은 여행 끝에 결국 자신이 만든 작은 연못과 정원에서 소우주를 찾았다. 이는 조선의 화가들이 산천을 순례하고 체험한 후 돌아와 가슴에 품은 비경을 소우주로 표현한 와일사상과 같은 맥락이다. 이후 후기인상파들이 대체예술로 동양을 받아들인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예술계 거장들의 작품에서도 난 동양적인 체취를 발견한다. 타국 생활을 정리할 때 못내 아쉬웠던 것은 보고 싶은 전시는 거리를 불사하고 달려가는 내 습관 때문이었다. 필자는 깊은 내공을 뿜어내는 완성도 있는 수작(秀作)들을 보면서 그 예술 혼으로 인해 나의 작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흐트러진 자신을 바로잡는다. 필자가 명화 순례를 고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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