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앤 조이] 요리도 인생도 高手 ■ 특급호텔 임원 셰프 3인방 서은영 기자 supia927@sed.co.kr 위에서부터 후덕죽 호텔신라 조리상무, 박효남 밀레니엄 서울힐튼 총주방장, 이민 서울웨스틴조선호텔 조리상무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최근 인기를 끄는 요리 만화책에는 무림 고수가 된 요리사들의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하지만 만화에만 나올법한 얘기만은 아니다. 실제로 국내에도 접시닦이에서 시작해 호텔 주방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들이 존재한다. 국내 호텔 업계는 임원 주방장이 3명이나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초와 최고의 자리를 꿰찬 이들은 후덕죽 호텔 신라 조리상무, 박효남 밀레니엄 서울 힐튼 총주방장, 이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 조리상무다. 이들의 요리 인생은 말 그대로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화려했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해치우고 국자로 매를 맞으면서 배우기 시작한 요리로 한눈 팔지 않고 정진해 최고 경력을 만들어낸 임원 세프 3인방의 빛나는 외길 인생 얘기를 들어본다. 1- 이민 서울웨스틴조선호텔 조리상무"한국적 에센스 담은 양식 선보이겠다" "조선호텔과 신세계 백화점에 오픈한 50개 이상의 레스토랑이 제 손을 거쳐서 문을 열었지요. 하지만 올해부터 제가 키울 자식은 양식당 '나인스 게이트' 하나뿐입니다." 29년 전통의 조선호텔 양식당 '나인스 게이트'가 최근 재개장하면서 이 민(47)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조리상무는 조리 인생 23년중 가장 큰 미션에 도전하고 있다. "나인스 게이트를 탈바꿈시켜 조선호텔의 오랜 역사에 걸맞는 한국적 양식을 선보이라"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한국적 양식'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퓨전요리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90년대 말보다 훨씬 이전부터 퓨전에 관심이 많았던 이 상무였지만 이 질문만큼은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숙제를 푸는 첫 단계로 이 상무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들을 사용하기로 했다. 좋은 천일염으로 담가 아삭한 맛이 살아있는 백김치부터 꼬막, 톳, 복분자 등의 재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백김치는 양갈비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립니다. 톳은 문어 샐러드에 넣어 씹는 맛까지 조화롭게 했어요. 재료를 섞는다고 어울리는 건 아니고 프렌치 요리 테크닉을 바탕에 깔고 서양 재료와 한국 재료를 조화롭게 매치해야죠." 공고 졸업 후 방위산업체에 근무하고 있었던 그에게 요리는 다른 세계였다. 그런데 생계비를 벌기 위해 포장마차를 운영하던중 롯데호텔 바텐더로 일하던 친구가 그의 음식 맛을 보고 조리학교 입학을 권유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 상무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조리학교에서 700여가지 음식을 만들어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 이후 요리가 천직이 됐다"고 말했다. 명망 높은 프렌치 셰프인 그는 요즘 조리 인생에 획을 그을만한 새로운 대표 메뉴를 구상중이다. 그는 "올해 안에 나만의 대표 메뉴가 될 수 있는 한국적 양식을 내놓을 계획"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2- 후덕죽 호텔신라 조리상무조리장은 남 쉴 때 움직여야 하는 업 호텔 신라 중식당 ‘팔선’의 총책임자이자 94년 호텔업계 최초로 주방장 출신 임원이 된 후덕죽(侯德竹ㆍ60) 호텔 신라 조리상무의 하루는 31년째 한결같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반쯤 호텔에 출근하고 오후 9시에 일과를 마친다. 꼬박 12시간을 호텔에서 보내는 셈이다. 후 상무는 “남이 일할 땐 물론 같이 움직이고 남이 쉴 때도 일해야 하는 직업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다”고 말한다. 화교 출신 조리장으로 국내 중화요리업계의 상징 같은 인물인 후 상무가 요리의 길로 들어선 첫 관문은 중식당이 아닌 양식당이었다. 68년 서울 UN센터호텔 양식당에 취직했지만 미국식 메뉴 일색이던 당시 양식당은 그의 갈증을 풀어주기에 부족했다. 그는 롯데호텔의 전신이던 반도호텔 중식당으로 옮겨 밑바닥부터 배워나갔다. 신라호텔 개장과 함께 79년 ‘팔선’ 오픈 멤버로 참여하면서 신라호텔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러나 오픈 후 2년이 지나도 당시 최고 중식당으로 꼽혔던 서울 프라자호텔 ‘도원’의 매출을 따라잡지 못하자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당장 문을 닫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시 이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폐점 위기를 막아준 ‘은인’이 됐다. 평소 후 주방장의 음식을 높이 평가했던 이 고문이 이 회장에게 “일단 맛을 보고 결정하라”고 권하자 후 상무의 요리를 맛본 이 회장은 더 이상 문닫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후 상무는 “당시 선대 회장께서 재고하지 않으셨다면 결국 오픈 3년만에 팔선이 국내 호텔 중식당 중 가장 높은 매출을 내는 걸 보지 못하셨을 것”이라며 “지금도 팔선은 국내 중식당 중 최고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후 상무의 이름에는 늘 ‘불도장’이 따라다닌다. 복건성 요리인 불도장(佛跳墻)을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여 널리 알린 인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후 상무의 머리 속에는 300여개의 레시피가 저장돼 있다. 300개면 충분할 듯하지만 그는 요즘도 요리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가 항상 후배들에게 “자기 계발을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강조할 수 있는 이유다. 그의 새로운 꿈은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것. 후 상무는 “후배들이 도전하는 조리사가 되길 바란다”며 “훌륭한 후배들이 많이 나와 나를 뛰어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3- 박효남 밀레니엄 서울힐튼 총주방장악바리 근성으로 최연소·최초 타이틀 박효남(48) 밀레니엄 서울 힐튼 총주방장에게는 늘 ‘최연소’,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83년 밀레니엄 서울 힐튼 창립 멤버로 입사한 박 상무는 99년 최연소로 이사직에 오른데 이어 2001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글로벌 체인 호텔 총주방장에 임명됐다. 그동안 체인 호텔 총주방장 자리를 독차지해오던 외국인의 벽을 한국인으로는 박 상무가 처음 깬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 상무는 루프트한자 항공이 퍼스트ㆍ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을 대상으로 선보이는 ‘스타 셰프’ 행사에 한국인 주방장으로는 최초로 초청돼 직접 조리한 프렌치 요리를 기내에서도 선보이게 된다. 프랑스에서 먹는 요리보다 더 프렌치 요리다운 음식을 만든다는 순수 국내파 셰프 박 상무의 요리 인생은 “배고파서” 시작됐다. 직업 군인 출신이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유복했던 가정이 위기를 맞자 박 상무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도봉구 의사협회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근처 요리학원에 다니게 됐다. 열심히 하는 그의 성품을 높이 산 요리학원장이 78년 그를 하얏트 호텔 조리 보조로 추천하며 그는 프로의 길로 들어섰다. 하얏트 호텔에서 박 상무는 경력 8년이 넘어야 오른다는 퍼스트쿡에 5년만에 올랐다. 83년 힐튼호텔 오픈 때 자리를 옮기면서도 박 상무는 진급을 택하는 대신 같은 직급의 퍼스트 쿡으로 입사하게 된다. ‘말보다 실력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그는 “내 능력을 말로 포장하는 대신 실력으로 보여줬기에 초고속 승진도 가능했다”고 밝혔다. 작은 키에 순박한 얼굴의 박 상무지만 악바리 근성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보통 주방 막내는 감자 깎는 일을 도맡는데 박 상무는 일과 중에도 틈틈이 감자 깎는 연습을 했고 퇴근길이나 잠들기 전에 달걀을 쥐고 감자 깎듯 돌리는 연습을 할 정도였다. 능수능란한 영어 회화 실력도 이 시기에 쏟아부은 노력의 결과다. 박 상무는 20대 후반이었던 79년 방송통신고에 입학해 만학의 열정을 쏟았으며 특히 외국 요리사와 영어로 대화하며 매일 영어 공부에 매진한 집념이 오늘의 그를 만든 밑거름이 됐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박 상무는 거창한 수식어 하나 없이 “평생 주방에서 냄비를 닦겠다”고 답한다. 은퇴할 때까지 주방을 떠나지 않고 이름 석자를 내건 레스토랑을 여는 게 그의 소박한 꿈이다. ▶▶▶ 관련기사 ◀◀◀ ▶ [리빙 앤 조이] 빛바랜 졸업장을 타신 당신께~ ▶ [리빙 앤 조이] '강박증' 머리속에 지우개가 있었으면… ▶ [리빙 앤 조이] 요리도 인생도 高手 ▶ [리빙 앤 조이] 사골, 이렇게 끓이면 맛있다 ▶ [리빙 앤 조이] 발목 가늘고 뼛속 선명해야 한우 사골 ▶ [리빙 앤 조이] 홍대앞 LP 카페, 인사동 다방이 좋은 이유는?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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