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대대적인 비서진 교체. 공석인 정무수석 정도만 인선할 줄 알았더니 허태열 전 비서실장을 비롯 무려 5명이나 옷을 벗겼다. 강력한 친정체제로 국정 장악 능력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인사의 클라이맥스는 물론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그가 누구인가. 잘 알려진 대로 박 대통령의 정치 멘토 그룹인 '7인회'의 핵심이다. 인수위 시절에는 정홍원 국무총리를 비롯, 주요 인사는 모두 김 실장을 거쳤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뿐이랴. 같은 7인회 멤버인 강창희 국회의장보다는 일곱 살이나 많고 정 총리에게는 까마득한 사법고시 선배다. '어당팔(어수룩해 보여도 당수가 8단)'의 다부진 강단을 보이는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서울대 법대 선배 앞에서는 무조건 한 수 접는다. 단순히 대통령의 멘토가 아니라 당ㆍ정ㆍ청 모두의 '어른'이라는 뜻이다.
2인자를 두지 않는 박 대통령의 성격상 그가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단순한 비서실장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쥐고 있었던 만기친람(萬機親覽)의 바통을 김 실장에게 넘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행보가 심상치 않다. 임명 다음날 야당의 대통령과 단독회담 요구, 여당의 3자회담 역제의에 5자회담이란 새로운 카드를 선보였다. 여와 야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미다. 6일 국무회의 때는 정 총리보다 반보 앞서 들어오는 모습도 포착됐다. 멘토의 등장이 청와대와 내각의 역학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잠시 시계를 잠시 과거로 되돌려 보자. 지난 1월21일 김용준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청와대 조직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말했다. "새 청와대 비서실은 국정운영의 선제적 이슈를 발굴하고 행정부가 놓치는 일을 챙기며 대통령 보좌 업무에 집중할 것"이라고. 비서실 기능을 대통령 보좌 역할에 한정해 장관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였다.
대통령 공약집 중 '정부 3.0'에서도 국무회의를 총리가 사실상 주재하게 하고 책임장관제를 확립하겠다고 했다. 이때 국정운영의 중심은 분명 내각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게 변했다. 사실상 총리에게 맡기겠다고 했던 국무회의는 3월 이후 절반이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렸다. 총리와 장관을 제치고 직접 국정을 챙긴 셈이다. 장관의 정책 주도 대신 국무회의 때마다 A4지에 수북히 담긴 대통령 말씀이 내려왔다.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 달라"는 주문도 '깨알 지시'로 바뀌었다. 대통령에 가려 장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강력한 멘토가 전면에 나섰다. 방향은 분명해졌다. 내각은 약해졌고 강한 청와대가 그 자리를 대체하리라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청와대 비서진을 교체한 것도 새로운 변화와 도전의 길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장관들)도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분명 '여러분이'가 아니라 '여러분도'였다. 내각, 장관은 변화와 도전에 동참하는 것이며 주도하는 것은 청와대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성과가 없으면 자리도 없다'는 메시지도 남겼다. 아직 살아남은 장관들로선 '어명'을 수행하기 위해 더욱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한 장관은 대통령의 지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날까지 일정에 없었던 현장 방문을 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누가 소신 있는 장관이 될 수 있을까. 책임장관제라는 실험은 7개월 만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청와대와 내각의 관계는 돌고 돌아 원위치로 왔다. 제 일을 제대로 못한 장관들의 책임일까. 그 정도밖에 할 수 없었던 조건 때문일까. 정확한 답을 내놓기 힘들 수 있다. 그래도 분명히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지금 책임장관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다는 것을, 그래서 실험은 그저 실험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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