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내년이면 일흔이지만, 그림 그리는 일은 늘 수행에 가까운 '농사짓기' 과정입니다. 끊임없이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되 마음에 안 들면 복토(覆土)해 완전히 새로 시작하기도 하지요. 젊은 시절엔 다양한 시도를 했다면 지금은 끝까지 파고들어 심연까지 닿을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9일 인사동 노화랑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1942년생 원로 화가 신양섭(68)의 말이다. 이번 전시는 공과 뜸을 들여 8년만에 열었다. 흰색 추상작업을 주로 선보여 '백색의 화가'라 불리는 그는 신작으로 두꺼운 면 천을 덧붙여 화면에 요철을 이룬 '내 안의 풍경' 시리즈를 선보였다. 작가는 "색,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그림이 지녀야 할 순(純)맛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1981년 '마지막 국전'의 대상 수상자이자 40년 이상 화업에만 몰두해 온 원로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최근 미술계에 원로작가 전시가 활발하다. 공평동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는 1940년대 김환기ㆍ장욱진ㆍ이중섭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던 88세의 노장 백영수 화백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12년 만에 한국에서 여는 개인전으로 196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130여 점을 선보여 회고전 성격을 띤다. 지난달에는 '한국적 색면추상'의 선구자인 전혁림(1916~2010) 화백이 최고령 원로 화가로서 아들 전영근 화백과 2인전을 열었으나 전시 직후인 5월 25일 타계했다. 한 미술전문 잡지에서 꼽은 '생존화가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화가' 10위권에 든 천경자(86)ㆍ김흥수(91)ㆍ서세옥(81)ㆍ권옥연(87)ㆍ김창열(81)은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대외활동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국내 미술계의 중추로 영향력이 크다. 미술품 경매의 상위 순위도 모두 이들이 주도한다. 국내외 활동이 활발한 원로 화가로는 추상 계열로 분류되는 박서보(79)ㆍ하종현(75)ㆍ이우환(74)ㆍ김구림(74)ㆍ이강소(67)ㆍ심문섭(67) 등이 있다. 원로화가들이 최근 잇달아 개인전을 열면서 미술시장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이들의 인지도와 친숙함 ▦미술사적 인정 ▦시장 검증 완료에서 기인한다.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인 정준모 국민대 겸임교수는 "불경기에 미술사적 흔들림이 없는 작고작가와 원로작가를 중심으로 미술시장이 움직이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라며 "젊은 작가가 감각에 호소한다면 원로작가는 감각을 넘어 감성까지 움직이며, 젊은 작가를 코스닥에 비유한다면 원로작가는 블루칩"이라고 분석했다. 김윤섭 미술경영연구소장은 "공산품 시장과 달리 장기적 안목이 필요한 문화 산업에서 불황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은 미술시장의 고른 평가와 인지도 있는 작가"라면서 "하지만 앞으로는 나이와 상관없이 참신한 조형적 탐구를 시도한다면 원로여도 '젊은 작가'로 불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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