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토'라는 말은 고려대 총장을 지낸 홍일식 박사(79)가 1980년대 초 처음 썼다. 나라의 위상을 땅 넓이가 아닌 문화의 잣대로 재는 시대가 왔다는 것인데 그때만 해도 신선했다. 한반도라는 좁은 땅덩어리 안에 갇혀 살지만 문화적으로는 얼마든지 큰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냉전(분단)의 벽도 문화의 힘으로 허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비록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지난 30여년간 우리의 문화영토가 크게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한류는 이를 보여주는 가장 감각적인 증거다.
문화영토는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1990년 제시한 소프트파워(연성권력)와도 일맥상통한다. 소프트파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하드파워(강성권력)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상대 국가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어떤 매력을 말한다.
그 매력은 광의(廣義)의 문화에서 나오니 문화적 힘을 통칭한다고 보면 된다. 맥락은 다르지만 국제정치학의 대부 한스 모겐소(1904∼1980)도 1948년 '국가 간의 정치'라는 고전적 저서에서 문화의 힘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제국주의를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제국주의로 나눴는데 이 중 가장 교묘한 것이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상대 국가 국민의 마음을 정복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지배)을 안정적으로 달성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
국가 관계를 권력 쟁투의 관점에서 본 모겐소가 문화의 순기능까지 얘기하기는 어려웠겠지만 문화는 국가 간의 첨예한 정치·경제적 대립을 완화해주기도 한다. 문화를 '스카프로 가린 총구'쯤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관주의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촘촘히 연결된 국제 환경에서 문화는 쌍방교류가 생명이기 때문에 상호이해와 협조를 가능케 하는 핵심 인프라다.
문화영토도 마찬가지다. 한정된 땅과 자원을 놓고 사투(死鬪)를 벌이는 공간이 아니라 누구든 상상력만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넓고 자유롭고 행복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상상력에는 관세가 없다. 내 나라의 영혼과 정신이 담기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보편적 존엄성과 인류문명에 대한 헌신의 욕구가 살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밝힌 신년 구상에서 경제영토를 개척하는 첨병으로 문화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풍성한 문화영토가 있어야 경제영토도 커진다는 취지였다. 문화영토는 확장성이 거의 무한대다. 그 영토를 어떻게 키우고 가꿀 것인지는 이제 문화예술인들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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