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병원비는 비싸기로 악명 높다. 중환자실에 하루 입원만 해도 1만달러가 든다. 생명이 위독해 긴박한 치료라도 받으면 통상 10만달러를 넘어선다. 단 하루 치료비가 그렇다.
미국의 병원비는 왜 그렇게 비쌀까.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같은 진보 색채가 강한 미 경제학자들은 민영의료보험 체계를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다. 보험사들은 잠재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전문가들이 가입 신청자의 병력·가족력 등을 깐깐하게 심사한다. 의료비가 청구됐을 때 지급 거부 가능성부터 검토하고 관련 소송도 빈번하다. 또 경쟁에 내몰린 민영보험사들에 광고·마케팅·영업은 필수다.
국민의료보험과 달리 치료에 쓰여야 할 돈이 엉뚱한 데로 새나가는 셈이다. 실제 미 정부의 노인 의료 프로그램인 메디케어는 재원의 2% 정도만 관리비로 쓰지만 민간보험사와 의료기관은 미국인이 의료비로 낸 돈의 30%가량을 관리비로 지출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의 1인당 의료비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의료비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지만 1인당 의사 진찰 건수 등 의료 서비스의 질은 중위권에 불과하다.
과도한 의료비는 소비, 기업의 채용과 투자, 정부 재정 등 전방위에 걸쳐 미 경제에 부담을 준다. 최근 리콜 파문을 겪고 있는 제너럴모터스(GM)의 2009년 파산 위기도 퇴직자에 대한 건강보험료 부담금이 한몫했다. 우리나라가 현행 의료보험 체계의 근간을 흔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반면 미 민영의료보험에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 고용 가운데 의료 서비스 비중이 우리나라의 3~4배에 이르고 보험사의 광고나 의료 분쟁 등도 고스란히 부가적인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와 같은 규제 기관이 없어 제약업체가 약값 결정권을 가졌다 보니 신약 개발을 노린 바이오 벤처들의 창업 열기도 뜨겁다.
우리나라에서 병원의 영리 자회사 허용이 의료 민영화의 사전 단계인지를 놓고 정부와 야당, 시민단체들이 입씨름을 거듭하지만 모든 정책이나 규제 완화에는 명암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른바 '손톱 밑 가시'로 대변되는 박근혜 정부의 규제 개혁 드라이브도 마찬가지다.
일단 경제 효율화를 위해 편익보다 비용이 크거나 시대착오적인 규제를 대폭 손질한다는 점은 환영할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규제 강화는 선'이고 '규제 완화는 악'이라는 식의 야당 논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미 버락 오마바 행정부도 지난달 초 500여개의 불필요한 규제를 재검토해 120억달러를 절감하겠다고 밝히는 등 전 세계가 규제 완화 경쟁에 들어간 상태다.
문제는 현 정부의 규제 완화 조치가 시장 진입 촉진 차원을 넘어 소비자 안전 등 공공선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16세 미만 청소년의 심야 게임 접속을 금지하는 셧다운 제도나 학교 옆 관광호텔 금지 등은 단순히 규제 완화 차원에서만 볼 문제가 아니다.
미국 등 주요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의 반칙행위나 금융시장에 대해서는 규제를 오히려 강화했다. 월가의 대형 은행들이 걸핏하면 수십억달러의 벌금을 얻어맞는 게 단적인 사례다. 또 사업자의 자발적 리콜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우리나라와 정반대로 미국은 최근 GM 사태를 계기로 자동차 안전사고 보고 기준을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현 정부가 규제 완화를 저성장 국면이나 서민소득 정체를 돌파할 만병통치약쯤으로 현실을 호도한다는 점이다. 한국이나 미국의 과거 사례를 보면 규제 완화가 대대적인 기업투자 활성화로 이어진 적이 많지 않았다. 미국의 여러 연구 결과를 보더라도 투자의 최대 걸림돌은 경기이고 규제는 부차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오바마 행정부가 대기오염 규제를 강화하자 정화기 부문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정반대의 연구 결과도 많다. 이 때문에 미국·일본·독일 등 주요국 정부도 경기 침체 돌파를 위해 최저임금 개선, 장기 실업자 구제, 소득 양극화 해소 등을 통한 중산층 복원과 내수 회복에 정책 초점을 더 맞추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규제 완화 요구가 터져 나오는 것도 그만큼 서민경기가 팍팍하다는 방증이다. 정부가 푸드트럭 규제를 완화하면 트럭 제조사야 좋겠지만 가뜩이나 파이가 줄어든 자영업 시장을 놓고 경쟁만 심화되고 주변 음식점·노점상들과 갈등만 심화될 게 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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