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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 강남에서 예식장 사업을 하는 분을 만났다. 자수성가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고 싶다고 했다. 친분이 두터운 저자가 이날 만남을 주선한 탓에 거절할 수 없는 자리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부진 사업가 스타일의 그는 취업이 어렵다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좌충우돌 인생 스토리가 귀감이 될 거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운동권 대학생 출신의 보험설계사가 1억원의 목돈을 모아 예식장 사업을 시작한 후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자랑스러운 인생사를 자서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인터넷·앱 위세에 출판 위기 절감
30분 가까이 계속되는 개인의 인생사가 배경음악처럼 스쳐가는 가운데 내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이 분의 출판 의지를 포기시킬 것인가'가 여러 가지 버전으로 시뮬레이션되고 있었다.
출판계에서는 이 같은 사례를 자비(自費)출판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스스로 돈을 들여서 책을 만드는 시스템이다. 직접 제작비를 대는 경우도 있고 출간된 책의 일정 부수를 구매하는 형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출판사는 자비출판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기획 의도나 콘텐츠가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 때문에 만났던 것인데 사업가의 콘텐츠 함량은 자비출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정중히 거절하고 말 것을, 이날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장님, 이 책 내시면 본인이 3,000부 구매하시겠어요?"였다. 농담처럼 불쑥 나온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100% 농담이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마음 바닥에 앙금처럼 남아 있다.
정말 책이 안 팔린다. 어느 출판사, 어느 저자 할 것 없이 예전에 비해 눈에 띄게 판매부수가 줄고 있다. 누군가 이 책을 필요로 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책을 만들 수가 없다. '소수를 위한 의미 있는 책'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다수를 위한 보편타당한 책'만이 제작되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기획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스타 저자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기껏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해서 만든 책조차 어디다 내놓고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 서점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의 관심은 나날이 다양해지고 있다. 책으로 배우고 익히던 지식이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앱)이라는 매체를 통해 더 빨리, 그리고 입체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물건은 만들었는데 정작 그 물건이 고객을 만나야 하는 접점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최근처럼 출판의 위기를 온몸으로 느꼈던 때가 또 있었나 싶다.
우리가 변하면 머잖아 돌아오리라
그날의 에피소드로 돌아가보자. 다음날 나는 만남을 주선한 지인에게 전화해 그 정도 성공 스토리와 콘텐츠로는 시장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인은 내게 저자가 3,000부 정도는 구매할 의사가 있다고 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시장이 없다고 쉬운 길로 가다 보면 스스로 자멸할 것 같아서다.
그 많던 독자들은 지금 출판계 스스로가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전자책으로, 앱으로, 혹은 또 다른 진화된 모습으로 끊임없이 콘텐츠의 진실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출판의 미래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오늘도 막연한 기대보다는 치열한 시장 판단으로, 한 사람의 독자보다는 다수의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출판 에디터들이 있다. 연어가 돌아오듯, 먼 바다로 떠나간 독자들이 '책의 바다'로 돌아올 그날이 머지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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