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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중심가. 구소련 잔재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벤처기업을 연상시키는 현대식 건물이 눈에 띈다.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이 창업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제품 연구개발(R&D) 및 각종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 '개러지(garage)48허브'다. 허브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사무실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탁구·다트 등으로 휴식을 취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에스토니안 마피아'들이다. 얼핏 들으면 에스토니아의 마피아 집단을 뜻하는 것 같지만 인구 130만명의 북유럽 소국인 이곳에서 주로 IT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창업을 모색하는 청년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의 유명 벤처투자가 데이브 매클루어 500스타트업스 회장이 지난 2011년 영국에서 열린 벤처창업경진대회 심사 도중 예선 통과 20팀 중 4팀이 에스토니아 출신인 사실을 놀라워하며 "마피아 같다"고 비유한 것이 시초다.
◇청년 벤처인들이 IT 창업 대국의 원동력=개러지48허브의 한 관계자는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 등 실리콘밸리의 거인들도 창고에서 출발했다"며 '개러지(창고)'라는 이름의 어원을 설명하면서 "당시의 창고 이미지를 재현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각을 실천하는 실리콘밸리의 개념과 행동 방향까지 들여오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한 달에 50명가량을 수용할 수 있지만 이용하려는 청년들이 몰리면서 경쟁이 치열하다.
에스토니아는 전세계 영토 순위 132위에 불과한 북유럽의 소국이다. 하지만 청년들이 IT 창업에 적극 나서면서 이 분야에서만큼은 '대국'으로 꼽힌다. 인구 100만명당 창업 기업 수가 110개로 이스라엘(375개), 미국(190개)에 이어 세계 3위다.
에스토니아 정부 차원에서도 청년들이 IT 창업에 나설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지난 1991년 소련에서 분립한 후 경제성장 동력을 찾던 에스토니아 정부는 IT에 주목하면서 인프라를 구축했다. 150여개 기업 및 산학협력 기관들에 창업 공간을 제공하는 '테크노폴'을 마련하고 곳곳에 창업 및 연구개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인큐베이터를 설치했다.
새로운 생각과 창의력을 중시하고 관료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은 특유의 문화도 청년들의 창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토마스 헨드리크 일베스 현 대통령도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프로그램 코딩 교육을 포함시키는 한편 행정절차를 온라인화해 15분이면 창업 등록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젊은이들이 IT를 통한 창업에 나설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은행(WB) 집계 에스토니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독립 직후인 1993년 2,596달러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지만 지난해에는 1만8,478달러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개러지48', 48시간 안에 시제품을 만들어라=에스토니아의 창업 열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사가 '개러지48'이다. 개러지48허브의 유래가 되기도 한 이 이벤트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48시간 내에 상품화가 가능한 시제품으로 만들어내는 해커톤(hackathon·정해진 시간 동안 프로그램을 해킹하거나 개발하는 행사)이다. 2010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팀을 짜 시제품을 만들 뿐만 아니라 PR·마케팅·관리업무 등 회사를 차렸을 때 필요한 제반 사항들까지 구성한 뒤 이를 프레젠테이션하는 모든 과정을 완수해야 한다.
허브에서 만난 개러지48의 공동 창립자 라그나르 사스(37)씨는 "창업에 필요한 기술들을 가장 빠른 시간에 알려주는 게 목적"이라며 "참가자들은 48시간 동안 작업을 통해 다양한 멘토와 전문가들에게서 개발 및 마케팅, 고객 응대 등 여러 가지 분야의 노하우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업 트레이닝을 받는 효과를 얻는다"고 밝혔다. 그는 "(개러지48이 만들어진 2010년 이후) 에스토니아의 IT 기업 수가 서너 배는 늘었다"며 "약 1,000명 정도가 개러지48을 통해 창업에 성공했으며 이대로라면 조만간 인구당 창업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구소련 시절부터 에스토니아가 수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정부도 실용과학에 적극 투자하고 있어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진출하는 '에스토니안 마피아'=인터넷전화(VoIP) 업체 '스카이프'의 성공 신화는 에스토니아 청년들의 벤처 신화에 불을 붙인 것은 물론 이들의 해외진출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에스토니아·스웨덴·덴마크의 청년 개발자들이 모여 만든 스카이프는 2005년 미국의 대표적 인터넷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가 총 26억달러에 인수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제품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셈이다.
글로벌 IT산업의 중심지인 미국 실리콘밸리에 진출하는 '에스토니안 마피아'들도 증가했다. 2007년 설립된 보안 솔루션 업체 가드타임은 지난해 미국 국가안보국(NSA)에 자사 솔루션을 납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농경지·기후·작물 등 농업 전반 통합관리 서비스 '바이탈필즈'는 2012년 창업한 후 2년 만에 라트비아·우크라이나·폴란드·독일 등 유럽과 카자흐스탄·북미·남미에 진출해 전세계에 25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스카이프 출신의 마틴 란트 최고경영자(CEO)는 "이 분야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시장규모가 연 1,100억달러까지 증가할 것으로 본다"며 "인터넷만 연결돼 있으면 회원 가입이 가능한 만큼 한국 농가와도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올 4월에 열린 개러지48 행사에서 목재의 사이즈·중량 등을 측정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출품해 우승한 여성 기업인 안나그레타 차흐크나(26)씨도 해외진출을 꿈꾼다. 그는 "벌써 독일·스웨덴·노르웨이·탄자니아 등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올해 말이면 나도 어엿한 에스토니안 마피아가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에스토니아의 스타트업으로 글로벌 투자자금도 몰리고 있다. 지난달에는 '괴짜 기업인'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이 계좌이체 애플리케이션 개발업체 트랜스퍼와이즈에 2,500만달러 투자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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