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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접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간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왜 유독 한국의 원화를 찍어서 거론했을까. 버냉키 의장은 19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샌타바버라에서 열린 FRB 콘퍼런스 연설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의 빠른 성장이 세계 경제를 견인한다는 찬사와 더불어 아시아 국가들이 수출주도형 성장 구조를 수정, 글로벌 불균형 해소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버냉키 의장 연설의 방점은 물론 후자에 있었다. 아시아 국가의 경제가 '찬사'를 받을 만큼 거의 회복됐으니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의 불안 요인을 해소하는 데 앞장서 달라는 주문이다. 지난달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미국 주도로 합의한 '글로벌 불균형 해소', 다시 말해 무역 수지 불균형 해소에 나설 것을 중앙 은행장이 직접 촉구한 것이다. 무역 수지 불균형은 곧 수출주도형 국가의 생명선인 환율의 절상을 의미한다. 버냉키 의장은 글로벌 불균형을 야기하는 아시아 국가의 수출주도형 성장구조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자본시장의 혼란과 자원 배분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결국 글로벌 경제의 위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버냉키의 한국 원화 관련 발언은 이렇다. "한국 원화는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지난 2008년부터 올 3월까지 40% 평가절하됐으며 부분적으로 회복했을 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아시아 국가의 자본 유출(달러 가뭄)을 언급하면서 나온 이 발언은 일견 한국 경제가 환율로만 본다면 아직도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는 일반적 평가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버냉키가 한 연설의 앞 문장을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버냉키 의장은 "전세계적인 자본유출(달러 가뭄)은 한국의 은행시스템에 손상을 입혔다"고 지적하면서 "아시아계 은행들이 달러 펀딩 압력에 직면하자 FRB는 호주ㆍ일본ㆍ한국ㆍ뉴질랜드ㆍ싱가포르 등 5개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고 밝히고 있다. 버냉키 의장이 이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환율을 언급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그럼 왜 버냉키 의장은 통화스와프 당사국 가운데 유독 한국의 원화가치가 얼마나 떨어졌고 아직도 더 오를 여지가 있다는 발언을 했을까. 통화스와프 대상 아시아 5개국 화폐 가운데 현재까지 위기 이전의 통화가치를 회복하지 못한 국가는 한국 원화뿐이다. 일본과 호주ㆍ싱가포르 등 3개국 통화는 이미 위기 이전보다 오히려 절상된 상태며 뉴질랜드는 거의 회복했다. 일본 엔화는 2008년 1월 달러당 111엔에서 올 3월 97엔로 절상된 데 이어 이날 현재 93엔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달 깜짝 금리인상으로 출구로 향한 호주의 경우 2008년 1월 달러당 1.20호주달러에서 현재 1.02달러로 통화가치가 상승했다. 금리인상으로 호주달러의 절상 추세는 더 가파를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같은 전형적인 수출주도형 경제국가인 싱가포르 역시 같은 기간 중 달러당 1.44싱가포르달러에서 1.39싱가포르달러로 절상됐다. 특히 금융위기 기간 중 원화 가치 하락속도는 버냉키 의장의 언급처럼 40%나 폭락하는 등 다른 4개국보다 더 심했다. 버냉키는 이 대목에서 한국이 통화스와프의 최대 수혜국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버냉키의 원화 발언은 미국이 통화스와프로 한국을 외환위기의 벼랑에서 구출했으니 한국이 글로벌 불균형 해소에 적극 나서달라는 주문이라는 해석은 무리가 아니다. 물론 이날 발언 전체의 요지를 본다면 아시아국가 전체의 화폐 절상, 그중에서도 중국을 겨냥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버냉키 의장은 속내야 어떻든 위안화 발언을 일절 하지 않았다. 중국 위안화는 달러가치와 연동되는 페그제로 묶여 있어 거의 변동이 없다. 위안화는 2008년 7월 이후 6.83위안에서 횡보를 보이고 있다. 이를 두고 월가 애널리스트들은 최근 들어 중국의 환율정책을 심심찮게 때리고 있다. 미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인 중국이 페그제로 묶어두는 바람에 위안화가 펀더멘털에 비해 너무 저평가됐다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터뜨리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2조5,000억달러의 외환을 보유한 중국은 미국 최대 채권국으로 미 재무부채권 8,000억달러어치와 그에 상당하는 공채(패니매ㆍ프레디맥 채권)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위안화 절상 압력이 가중될 때마다 미 국채 매각카드를 들어내면서 역풍을 비켜왔다. 버냉키 의장이 한국 환율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배경에는 위안화 절상 속도를 가속화 하라는 간접 메시지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버냉키 의장은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수출에 인센티브를 줘가며 거둔 무역흑자는 자국산업과 자원배분의 왜곡을 가져온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발언으로 보인다. 모리스 골드스타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중국이 위안화 평가 절상을 가파르게 하지 않는 한 글로벌 불균형 해소는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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