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요즈음 국민행복기금과 관련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울화통이 치민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바보스럽다는 느낌까지 든다. 김씨는 살면서 여러 차례 금융기관 대출이나 친척,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린 적이 있지만 다 갚았고 일부는 지금도 갚고 있다. 물론 주위에서 빌린 돈을 떼먹는 사람도 봤다. '돈이 배신하지 사람이 배신하냐!' 하는 얘기도 종종 들었다. 그러나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빚은 꼭 갚겠다는 신념으로 살면 하늘도 돕는다는 생각을 김씨는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빚 안 갚기'를 오히려 권장하는 모양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인 국민행복기금 제도를 통해서다. 조만간 출범할 것으로 보이는 이 기금의 핵심 중 하나는 원금 탕감이다. 이자는 물론 부채 원금의 30~50%까지 탕감해준다. 사실상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이 같은 자극적인 공약을 통해 상당한 재미를 봤을 것으로 분석된다.
원금 탕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농가 부채 탕감은 그동안 여러 차례 있어왔다. 지난 2003년 카드 사태 때도 카드 빚에 짓눌린 사람들의 부채 원금을 일부 탕감해줬다.
하지만 해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원금 탕감을 해주면 그동안 열심히 빚을 갚았던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는 논란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박 대통령도 형평성 논란을 염려했다. 그는 당선자 시절 인수위원회 국정과제 토론회에서 "성실하게 채무를 상환하고 있는 국민들은 이게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형평성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활 의지가 있는 분'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형평을 맞추는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없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금 정상적으로 빚을 갚고 있는 사람들도 원금을 일부 탕감해줘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자활 의지를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그 근거도 명확지 않다.
당국에서는 젊은 층의 경우 원금 탕감을 최소화하고 노년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방향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나온다. 그러나 이 정도만 갖고 일반인들이 형평성이 충족됐다고 느끼기 어렵다.
원금 탕감에 들어가는 비용을 세금으로 감당한다면 논란은 더욱 커질 수 있다. 당초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공약 당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의 신용회복기금 등으로 1조8,000억원의 시드머니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채권을 발행해 18조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제 시행이 임박한 상황이니 캠코 신용회복기금 8,700억원으로 일단 시작한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자금 소요 등이 늘어나면 정부 보증 채권을 발행해 충당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1조8,000억원의 시드머니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나중에 이를 기초로 18조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한다는 것도 문제다. 계산상으로는 채권 발행 이자만 감당하면 10배의 채권 발행도 가능하지만 부실화되면 뒷감당은 온전히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부에서 매입하려는 부실채권은 연체 기간 6개월~1년 이상 된 것들이다. 장기간 연체된 채권들인 만큼 빚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국민행복기금 자체가 부실화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금으로 불량 채무자들의 빚을 갚아준 꼴이 된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의 부실채권을 얼마에 사느냐도 관건이다. 잘못하면 금융회사들로 하여금 골치 아픈 가계 부실채권을 정부에 떠넘길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하는 꼴이 될 수 있다. '국민행복기금이 은행행복기금이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은행의 책임도 명확히 해야 한다. 과도한 가계부채 문제는 채무자의 잘못도 크지만 여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금융회사들의 책임도 크다. 부실채권 가격 산정 시 이 같은 책임도 물어야 한다.
신용사회의 기초는 '빚 갚기'다. 정치적인 목적의 원금 탕감이 반복되면서 신용사회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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