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과 거래량은 일반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금껏 주택시장이 보여왔던 가장 보편적인 틀이다.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투자자의 수요가 거래시장을 움직이는 주요 축이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 집값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수도권의 주택거래가 급격히 감소했던 배경에도 이런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같은 보편적 틀이 깨지고 있다. 단초를 제공한 것은 전셋값 급등이다. 전세시장에 집중됐던 수요가 빠른 속도로 매매거래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부동산시장 장기 침체로 집을 팔려는 이들보다 집을 사려는 이들의 협상력이 커지면서 급매물 위주의 거래가 이어지고 있다. 가격의 오르내림에 상관없이 거래가 늘어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저금리 기조와 정부의 실수요 중심 대책까지 겹치면서 최근 들어 이 같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집사는 전세족…싼 값 아니면 안 사=부동산114에 따르면 올 1·4분기 수도권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 분기 대비 0.67% 올랐다. 올해보다 거래량이 1만1,963건 적었던 2006년 1·4분기에는 집값이 6.63% 상승했다. 호황기 때보다 거래는 더 많이 됐는데 집값 상승률은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더욱이 1·4분기 집값 변동률은 이 기간 소비자물가상승률(1.1%)에도 못 미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과거와 달라진 구매 패턴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그동안 전세시장에 머물고 있던 실수요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거 매매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4월 수도권 아파트의 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전세가율)은 65.2%에 달한다. 올 들어 매매거래가 활기를 띠면서 최근 전세가 상승세는 주춤하고 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부동산 대책 이후 반짝 살아났다가 다시 주춤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거래 수준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과거와 같은 묻지마 식의 추격매수가 사라진 것도 눈에 띈다. 싼 값이 아니면 집을 사지 않는 분위기다. 미래가치가 좌우하던 과거의 주택 구매 기준이 현재 가치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양지영 리얼투데이 리서치팀장은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들다 보니 최근 아파트 구매에 나선 수요자들은 급매물만 찾는다"며 "따라서 거래가 많이 늘었음에도 집값은 안정세를 보이는 다소 낯선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금리·실수요 대책도 영향=장기 불황에 따른 초저금리 기조와 정책당국의 실수요 중심 대책은 이 같은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 상관없이 내 집 마련에 나선 실수요자들이 거래시장의 중심축이 된데다 저금리와 정부 대책으로 구매비용이 줄면서 대거 주택 구매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는 "집값이 오르지 않은 상황에서 전세가격이 오르면서 세입자들이 내 집 마련에 나섰고 이에 과거의 투자형 주택구매 양상도 급매물만 찾는 '생존형'으로 바뀌었다"며 "여기에 저금리 기조와 정부 지원책으로 추가적 비용 없이 집을 마련할 수 있게 되면서 가격 상승 없는 거래량 증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것은 그동안 수요자에게 외면받아온 중대형 아파트 거래도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1·4분기 서울지역 85㎡ 초과 중대형 아파트의 거래량은 4,358건. 이는 집값 급등기였던 지난 2006년 같은 기간의 1,643건과 비교해도 세 배 가까이 많은 수준이다. 전체 거래량에서 중대형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도 19.29%로 2006년의 10.05%보다 10%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중대형 거래는 전용 101~135㎡(40평형대)가 2,796건으로 전체의 64%를 차지했다.
허윤경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역적으로 보면 분당과 용인을 비롯한 경기 남부권 버블세븐의 중대형 거래가 많이 늘었다"며 "그동안 대형이 공급되지 않았고 가격도 많이 조정되다 보니 중소형에서 중대형으로 갈아타려는 실수요자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가격 상승 없는 거래량 증가 현상이 장기적으로 이어질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허 연구위원은 "집값과 거래량이 호황기와 다르게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래량이 늘어나면 최소 물가상승률만큼의 가격 상승이 있어야 정상"이라며 "장기적으로는 가격과 거래량이 완만하게 상승하는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